모하정

뜻을 이루지 못한 애환이 담긴 곳

사람은 때를 잘 만나야 한다고 했던가. 기회가 왔는데 능력이 없어서 그 일을 맡을 수가 없고 능력은 쌓았는데 기회가 안 올 수도 있다. 흔히 이른 시기에 성공은 독약이라는 말이 있다. 무르익지 않았을 때의 성공은 자신을 망치는 경우가 많다. 안동의 모하정은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임춘을 모신 곳이다. 고려 건국공신의 후예로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할아버지 임중간(林仲幹)과 상서(尙書)를 지낸 아버지 임광비(林光庇)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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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을 편안하게 했다는 안동에서 삼일 독립운동 봉기의 선도마을은 바로 이곳이었다고 한다. 금수 고장이라고 새겨져 있는 이곳은 금소리다. 비봉산 아래의 오동소에는 거문고가 있어서 금소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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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광 좋은 곳에 정자가 있어서 멈추어서 바라보았다. 모하정과 화악정이 이곳에 자리하고 있다. 지어진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오래 전의 사람을 모신 곳이다. 건국공신 집안이며 조상 대대의 공음전(功蔭田 ; 고려 시대에, 공신과 오품 이상의 벼슬아치에게 공을 따져 지급하던 토지)까지 있었던 임춘은 말 그대로 금수저 집안이었다. 그렇지만 정중부가 일으킨 무신의 난으로 집안은 급속하게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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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 전후에 무신란을 만나 가문 전체가 화를 입었을 때 그는 겨우 피신하여 목숨은 부지하였다. 부족한 것이 없이 살았을 임춘은 이후에 개경에서 5년간 은신하다가 영남지방으로 피신하여 7년의 타향살이를 한다.


“문관(文冠)을 쓴 자는 비록 서리라 할지라도 종자를 남기지 말라.” 고려의 문신 귀족정치는 종말을 고하고 새로이 무신정권의 성립을 보게 되었다. 그 뒤, 1세기 동안이나 무신들에 의한 정치 지배가 계속되어 고려사회에 일대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임춘의 세상은 다시 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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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석위에 살짝 올려서 만들어놓은 모하정은 단아한 느낌이 드는 곳이다. 20대초에 고난을 겪은 임춘은 당시 정권에 참여한 인사들에게 벼슬을 구하는 편지를 쓰기도 했지만 결국 끝내 벼슬길에 오르지는 못하였다.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실의와 빈곤 속에 방황하다가 일찍 죽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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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달리 불우하였던 생애를 군자의 도로 지켜가고자 하였지만 그는 삶을 유지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어릴 때의 가난과 고난은 평생을 남 탓을 하면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기도 하지만 인생 예방주사로 생각한다면 다시 디디고 일어날 능력을 배양시켜주기도 한다. 부족한 것이 없는 집안에서 자라나 고난을 겪고 못 일어나는 사람들을 수없이 보았다. 사대부로서 무인들의 집권으로 심한 배척을 받아 정치·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으며 살다 불우하게 인생을 마감한 저자의 처지가 그의 작품 공방전에 그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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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자리한 건물은 화악정이다. 1972년에 건립한 이 정자는 조선 현종 때 세명, 근명, 순명 삼 형제를 위한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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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춘은 자신의 처지를 글을 통해 풀어보려고 했다. 글로는 말하고 싶은 것을 다 적을 수는 없다. 글은 때론 무력하기 때문이다. 문명을 날리며 귀족 자제다운 삶을 누렸지만 1170년(의종 24)에 무인란이 일어나자 그의 삶은 갈길을 잃었다. 그의 글 중 많은 부분이 이 당시에 씌어진 것인데 대부분 실의와 고뇌에 찬 생활고를 하소연하는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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