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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Apr 18. 2023

한산(韓山)의 삶

옛 모습으로 복원된 한산군의 중심지였던 공간 

모든 건강한 생각은 다양성에서 나온다. 다양성이 사라지는 순간 장점보다 단점이 훨씬 많아지게 된다. 예를 들어 근친으로 세대를 있어가면 사람의 DNA에서 가장 안 좋은 변이만 일어나며 같은 생각을 가진 집단은 편향적이 되어 다른 집단을 수용하지 못한다. SNS채널의 대부분 자신의 취향으로만 노출하면서 차별적인 성향도 나오고 있다. 생태학의 분야에서 경계라는 공간이 있다. 2개의 서로 다른 생태계가 만나는 지형을 가리키는데 바다와 육지가 만나는 곳은 가장 비옥하고 생산성이 큰 지역이다. 

조선시대에 노비나 양인의 상당수는 성이 없었지만 조선말기에 이르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씨를 가지게 되었다. 하나의 성씨가 나온다는 것은 대를 이어 다양한 노하우와 함께 가문의 전통을 이어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집성촌이지만 부계에 의한 것이고 부인들은 다른 성씨를 통해 유전자의 다양성을 꾀하여왔다. 

서천에 한산군이라는 지역은 한산 이 씨의 고장이라고 보아도 무방한 곳이다. 풍수지리학적으로 금계의 알 모양을 딴 형상에 서천 한산읍성이라는 곳이 있었다. 한산 이 씨의 뼈대를 만든 사람으로 성리학 대가 이곡(李穀)이 있다. 충숙왕 7년(1320년) 과거에 급제해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를 지내고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이며 아들이 여말 유명한 성리학자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 목은(牧隱) 이색(李穡)이다. 

많은 것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앞서 말한 것처럼 다양성을 통해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사람 역시 생각에 다양성이 없으면 고착화되어 다른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 조선조 축성방식인 서천 한산읍성은 복원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한산읍성은 조선조 왜구방어를 위해 다른 읍성과 달리 ‘내륙지방’에 쌓은 특이한 성곽으로 분류되어 있는데 ‘동국여지지’에는 조선 성종 14년(1493년) 수축을 시작, 중종 대 1496년 완공했다고 기록돼 있는 읍성이다. 읍성 안에는 도랑 1개와 우물 4곳이 있었다고 한다. ‘여지도서’는 빼곡했던 읍성 안 객사, 동헌, 대청, 서헌, 중대문, 외대문, 소중문, 내위, 행랑, 도재헌, 매화당 등의 건물들을 낱낱이 기록했다. 

서천 한산읍성으로 올라가서 내려보면 한산읍이 한눈에 보인다. 한산군으로 불렸던 곳이었지만 한일병탄 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면단위로 격하된다. 이곳에는 큰 장이 섰는데 모시시장이 열리며 모시와 관련된 다양한 물품이 거래되었던 곳이다. 

이곳은 서천에서도 안쪽으로 들어와 있어서 바로 금강과 접하지는 않지만 단상천과 원상천이 금강과 연결되어 배들이 올라오기도 했었다. 왜구들 역시 금강을 통해서 올라오다가 한산까지 상륙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이곳에 읍성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성곽 전체의 형태는 서쪽 벽이 동쪽 벽보다 길며 북쪽 성벽은 성 돌로 쌓은 흔적이 남아 있으며 남쪽 벽은 토성이었다. 토성 위에 여러 차례 수축이 이루어진 흔적이 남아 있다. 

서천 한산읍성에 올라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생각해 본다. 사람들은 누군가를 두려워할 때 그 대상을 사물화 한다. 그렇게 되면 상대는 인간이 아니고 위협이 되어버린다. 때론 이해할 수 없는 편향과 차별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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