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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붱 Apr 12. 2024

[소설] 희망

엽편소설

아침 일찍 매장 청소를 끝내고 오픈 준비를 마친 상덕은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커피를 내리며 생각했다. 아, 그냥 장사를 접어야 하나.


상덕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름만 대면 알만한 금융회사의 직원이었다. 어린 나이지만 승진도 빨라서 과장 진급을 앞둔 어느 날, 회사에선 ‘권고사직’이니 ‘희망퇴직’이니 하는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마침 AI가 핫하게 떠오르던 때였고, 상덕이 속한 금융권은 AI로 대체될 가능성이 높은 직종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상덕은 권고사직이나 희망퇴직 같은 건 본인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입사 후 인사평가는 대체로 좋았고, 몇 년 전엔 사내 아이디어 대회에서 입상도 한 자신을 회사가 그리 쉽게 내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이 얼마나 안일한 생각이었는지를 깨닫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바로 어제까지 옆자리에서 같이 일하던 최 과장이 희망퇴직이라는 이름으로 회사를 그만두게 된 다음 날, 상덕 역시 회사로부터 이런 통보를 받았다. 권고사직을 당하겠느냐, 희망퇴직을 하겠느냐.


회사는 상덕에게 선택권을 주는 듯 말했지만 실상은 그저 통보에 가까웠다. 상덕은 당황했지만 이내 상황을 받아들였다. 기왕 잘리는 거라면 회사로부터 받을 수 있는 건 최대한 받아내자.


상덕은 희망퇴직을 선택했다. 그 결과 퇴직금 외에 기본급 40개월 치에 해당하는 특별 퇴직금과 생활 지원금은 물론 전직 지원금까지 두둑이 챙겨 받았다.


태어난 이후 처음 만져보는 엄청난 액수의 돈이 계좌에 찍힌 것을 보고 상덕은 생각했다. 이거라면 뭐라도 해볼 수 있겠는데?


그렇게 호기롭게 시작한 게 바로 상덕이 지금 운영 중인 이 카페다. 원래는 미용실이었던 곳을 개조하여 카페로 개업했다. 걸어서 약 10분 이내에 역이 2개나 있고, 근처에 여대까지 있어서 접객은 문제가 없을 거라고 여겼다. 그렇게 개업한 지 2년이 지났다.


예상대로라면 상덕은 이제 직원도 한 세넷 쓰면서 본인은 해외여행이나 슬슬 다니는 생활을 하고 있어야 했지만, 현실은 직원은커녕 점심시간에 한두 시간 잠깐 쓰는 아르바이트조차 구하기 어렵고 해외여행은 무슨, 주말은 물론 평일에도 마음 편히 쉬지 못하는 생활이 벌써 2년째 이어지고 있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통장잔고까지 슬슬 바닥이 나고 있었다.


언제까지 이 카페를 운영할 수 있을까, 암담해하고 있던 그때 출입문에 걸어둔 풍경이 ‘딸랑딸랑’ 거리며 청아한 소리를 냈다. 오늘의 첫 손님이었다.


“어서 오세요~”


상덕은 자신의 복잡한 심경이 드러나지 않도록 평소보다 더 밝은 미소를 지으며 오늘의 첫 손님에게 활짝 웃어 보였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중단발의 머리를 검은색 머리끈으로 질끈 묶고 도수가 꽤 있어 보이는 돋보기안경을 쓴 20대 중 후반의 여자. 일주일에 한두 번씩 카페에 와서 자소서를 쓰거나 면접 준비를 하는 것 같은 취업 준비생이었다.


“오늘도 아메리카노에 얼음 적게, 맞죠?”


“..... 네.”


코끝에 걸쳐진 안경테를 검지 손가락으로 쓱, 밀어 올리며 그렇게 말한 여자는 늘 앉는 구석진 테이블에 품 안 가득 가져온 참고서며 노트북 따위를 하나씩 내려놓았다.


아마 저 손님은 오늘도 오전 내내 저기에 앉아서 자소서를 쓰든 뭘 하든 할 것이다. 아메리카노 한 잔이 3,500원이니까 앞으로 약 3시간 동안의 카페 매상은 3,500원에 그칠 테지. 


상덕은 그 사이 누군가 더 와서 매상을 올려 줄 거라는 기대는 전혀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게 가뜩이나 안 좋았던 매출이 몇 달 전 길 건너편에 새로 생긴 대형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 덕분에 반토막이 난 상황이었기에.


“타다다다닥”


상덕은 분주한 손놀림으로 키보드를 누르는 여자 손님의 테이블 위에 올려진 책들 속에서 반가운 이름을 하나 발견했다. OO금융지주회사. 상덕이 다녔던 회사였다. 


‘SY’라는 이니셜이 큼지막하게 적혀있는 그 책은 상덕이 다녔던 회사의 적성검사 기출문제집이었다. 아니, 필요 없다고 사람을 자를 땐 언제고, 신입은 또 뽑는다고?! 상덕은 속에서 부아가 치밀었다.


이제라도 회사에 다시 연락해 볼까? 다른 데서는 재입사 같은 것도 된다고 하던데. 근데 재입사를 하게 되면 이미 받은 것들은 어떻게 하지?


상덕은 가게를 차리면서 회사로부터 받은 돈을 거의 대부분 사용했고, 설사 돈을 안 쓰고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미 퇴사한 지 3년이나 된 사람을 회사가 다시 고용해 줄 것이란 보장도 없었다. 


어쩌지. 이대로 그냥 손가락 빨고 지내다 그나마 남은 돈까지 홀랑 까먹고 길바닥에 나앉게 되는 거 아냐? 순식간에 드는 무서운 생각들에 상덕은 몸서리를 쳤다. 그때, 또 한 번 ‘딸랑’ 풍경이 울렸다.


“여기 디카페인 커피도 있나요?”


화장기 하나 없는 맨 얼굴로 품에는 아기띠를 한 여자가 초조한 표정으로 상덕을 바라봤다. 상덕은 포스기 아래에서 디카페인 음료 전용 메뉴판을 꺼내며 말했다.


“그럼요. 이 안에서 마음껏 골라보세요!”


그러자 불안해 보였던 여자의 얼굴에 순간 화색이 돌았다. 그걸 보며 상덕은 생각했다. 아직 포기는 이르다고. 지금 여기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보자고.


오전 내내 더는 손님이 안 올 거라고 생각한 자신의 생각이 깨진 그 순간, 상덕의 마음속에서도 희망이라는 이름의 싹이 퐁,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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