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가요 이야기 #5
구국의 강철대오 “전대협” 1 (https://brunch.co.kr/@back2analog/174)에서 이어집니다.
1996년, 김영삼 정권 당시 있었던 연대 사태 이후, 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하는 폭력집회는 조금씩 사라져 갔다. 화염병이 사라지고 난 후 꽤 오랫동안 세상의 변화를 바라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집단적으로 표현할 방법을 찾지 못했던 것 같다. 그리고 2008년 광우병 촛불은 시위 문화의 새로운 변곡점이 되었다. 비밀리에 택(시위 전문용어)을 전달받아 누군가 동(역시 시위 전문용어)을 뜨길 기다리며(가끔은 동이 안 뜨길 기대하며 ^^;), 긴장된 마음으로 시위에 임했던 그 시절을 생각하며 광우병 촛불 시위에 참석했다가 크게 당황한 적이 있다. 가두엔 동을 뜨는 지도부도 없고, 정해진 행진의 방향도 없었다. 그저 미국산 소 수입을 반대하고, 그걸 무슨 시혜라도 베푸는 듯 발표한 이명박 대통령을 반대하는 사람들만 드글드글했다. 그 어설픔을 당시 대통령은 컨테이너 박스를 쌓고, 그 겉에 기름칠을 해 오르지 못하게 만든 ‘명박산성’으로 막았다.
얼마 전 교육 선진국 덴마크의 초등학교를 방문했을 때 보았던 모습이 ‘일사불란함’이 아니라 ‘자유분방함’이었던 것처럼, 시민의 진정한 힘은 단일함이 아니라 다양성에서 나온다. 혹자는 촛불혁명을 신념을 주장해 온 시민사회의 성과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난 오히려 역설적으로 그 신념의 주장을 포기한 결과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 많은 시민들이 각자 자신의 절박한 신념만을 주장했다면 촛불혁명은 분열로 끝났을지 모른다. 촛불집회 초반, DJ DOC가 박근혜 대통령을 비판하기 위해 발표한 “수취인 분명”이라는 노래가 여성 혐오 논란을 일으키며 잠시 혼란에 빠지기도 했지만, 촛불시민들은 그 혼란을 슬기롭게 극복했다.
사회문제의 정답은 현장이 아니라 ‘삼천포’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필자의 지론이기는 하지만 너무 오래 엉뚱한 곳에 머무른 것 같다. 다시 전대협, 아니 이제 이 글의 주제인 “전대협 진군가” 이야기를 해 보겠다.
“전대협 진군가”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한양대 윤민석의 작품으로 그를 민중가요 판의 대표 작곡가 반열에 올려놓은 곡이다. 윤민석은 최근에도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등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노래들을 생산해 내고 있다. 마치 역사에 진 빚이라도 갚으려는 듯...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난 역사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는 우리가 여전히 윤민석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의 노래가 아니었다면 우리가 보낸 그 처절한 삶의 과정이 얼마나 건조했을까? 돈이 최우선인 이 시대에 그 가치를 감히 돈 따위로 환산할 수나 있을까?
“전대협 진군가”는 당시 모든 학교에 학교를 대표하는 진군가 만들기 붐을 일으켰다. 민족이라는 수식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성균관대학교도 “배움만이 보배 아닌 성균관 대학”이라는 훌륭한 교가가 있었지만 별도로 “민족성대 진군가”라는 곡을 만들어 집회 때마다 불렀다.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그 노래의 완성도가 가히 “전대협 진군가”에 버금가 대학 연합집회가 있을 땐 성대를 소개하기 전에 다른 학교에서 먼저 “민족성대 진군가”를 불러주곤 했다.
첨부하는 동영상은 1993년, 94학번 신입생들을 위해 만든 노래 테잎에 실렸던 “전대협 진군가”이다. 필자가 편곡하고 성대 국문과 노래패 ‘꼴굿떼’가 불렀다. 1993년엔 아직 한총련 진군가가 나오기 전이라 전대협 진군가의 1절은 장엄하게(?) 전대협으로, 2절은 빠르게 한총련으로 개사해서 불렀다. 가사가 서로 다른 멜로디와 리듬으로 대선을 이루며 주고받는 이 편곡은 한총련 소속의 한 기획자가 성대까지 찾아와 나에게 악보를 부탁해 1994년인가, 95년에 한총련 출범식에서 쓰이기도 했다. 25년이 지난 테잎이다 보니 음질은 구리구리 하다. (@Back2Anal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