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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백수 채희태 Nov 15. 2019

구국의 강철대오, "전대협" 1

민중가요 이야기 #5

2008년 광우병 촛불 때였나? 한번은 다양한 시민들의 기발하고 창의적인 깃발 가운데 전대협 깃발이 오른 적이 있었다. 전대협을 폭력 시위와 연관 지어 생각하는 ‘불순분자’들은 촛불을 든 평화 시위에 전대협 깃발이 오른 것을 보고 우려를 했지만 난 그 깃발을 보자 가슴이 뛰었다.

아! 전대협 깃발을
2008년에 다시 보다니...
2008 광우병 촛불집회 때 등장했던 다양한 깃발

1987년부터 92년까지... 청년학생들은 전대협이라는 이름으로 매일 전국의 가두를 누볐다. 임수경은 전대협을 대표해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여하기 위해 베를린을 돌아 평양으로 갔다. 어쨌든 대한민국을 대표해 북한 땅을 공식적으로 밟은 첫 번째 인물은 김대중 대통령도, 노무현 대통령도 아닌 전대협의 대표 임수경이었다. 1989년인가 90년엔 대한민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단체 1위(맞나?)로 전대협의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확인해 보니 1990년 <시사저널> 여론조사에서 여당과 야당에 이어 '한국을 움직이는 단체' 3위에 올랐고 이는 전경련이나 대기업보다 앞선 순위였다고...). 1993년 한총련(한국 대학 총학생회 연합)이 결성되며 발전적으로 해체되기 전까지 전대협(전국 대학생 대표자 협의회)은 명실상부 백만 청년학도의 자랑이었다. 하지만 누군가, 아니 역사의 진보를 바라지 않는 불순분자에게는 전대협이 조폭을 능가하는 구제불능의 폭력집단으로 보였을 수도 있다. 그랬던 전대협이 시간을 돌고돌아 다양한 깃발 중 하나, 소위 ‘one of them’으로 등장한 것이다. 

전대협은 2012년 "강철대오 : 구국의 철가방"이라는 영화에 제목으로 패러디되기도...

광우병 촛불 얘기가 나왔으니 독일 에버트 재단으로부터 인권상을 수상한 2017년 광화문 촛불혁명에 대해 잠시 짚고 가자. 대한민국이 월드컵 열기로 뜨거웠던 지난 2002년, 미군의 장갑차에 의해 압사당한 효순이 미선이를 추모하기 위해 시작된 촛불집회가 이제는 대한민국 시위문화를 대표하는 상징이 되었다. 심지어 지난 2005년에는 이명박과 박근혜도 노무현 정부에서 추진하려고 했던 사립학교법 개정 반대를 위해 촛불을 들었을 정도니, 대한민국에서 촛불은 좌우를 떠나 자신의 생각을 평화적으로 주장하기 위한 대표 수단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박정희의 5•16 쿠데타로 시작되어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진 군사독재 시절, 대한민국의 시위를 대표하는 수단은 ‘촛불’이 아닌 ‘화염병’이었다. 그때는 최소한의 민주적인 요구를 하기 위해 화염병 정도는 들어줘야 했다. 국가 권력은 총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므로…. 1993년 문민정부를 표방한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면서 시위대의 화염병 사용은 급격히 줄어들었고, 1996년 학생운동의 몰락으로 이어진 연세대 사태 이후 화염병은 저항이 아닌 폭력 시위의 상징이 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화염병과 현재 시위 문화를 대표하는 촛불을 단순하게 폭력과 비폭력이라는 이분법적 상징으로 나눌 수는 없다. 화염병은 모든 사람이 던질 수 없지만, 촛불은 모든 사람이 들 수 있다. 화염병은 시대의 분노를 대리해 청년학생들이 던졌지만, 촛불은 시대의 분노에 공감하는 어른과 아이, 여성과 남성, 즉 모든 시민들이 들고 나온다. 2008년 이른바 광우병 촛불 때 유모차 부대가 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손에 화염병이 아닌 촛불을 들었기 때문이다. 시위라는 영역에서 물리력이라는 ‘전문성’이 해체되면서 오히려 시위가 추구하고 있는 본질인 대중성이 확보된 것은 매우 흥미롭다. 물론 결과와 무관한 ‘저항의 표현’일 수도 있고, 특정 가치에 대한 ‘공감대의 확대’일 수도 있는 시위를 바라보는 견해는 다양할 수 있지만….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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