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가요 이야기 #9
2. 문화현상으로서 민중가요가 가지는 의미
하나의 문화현상으로서 민중가요가 가지는 의미를 살피기 전에 먼저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자. 지금은 우리가 노동과 다소 무관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단어인 예술, 즉 ‘art’의 라틴어 어원은 ‘ars(아르스)’이다. ars는 그리스어 ‘techne(테크네)’에서 유래한 말이다. 예술의 어원인 techne는 노동의 생산성을 향상하기 위해 도구를 다듬는 기술을 표현한 단어였을 것이다. 그러한 techne가 계급사회가 되면서 지배계급은 자신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도구로 ‘art'를 취하고, 피지배계급은 노동과 밀접하게 연관된 ‘technic’을 물려받았다.
기원전 14세기 이집트 제18대 파라오인 투탕카멘의 얼굴을 황금으로 만든 장인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고대 그리스 시대에 살았던 또 다른 장인은 라오콘 군상의 일그러진 표정을 통해 신의 뜻을 거역하면 이렇게 고통스러운 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경고를 담으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계급사회에서 예술이 지배의 도구로 사용되었다고 해서 예술을 부정적으로 규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예술은 노동으로부터 분리되면서 비로소 전문적이고 독자적인 성장의 길을 걷게 되었다. 예술이 여전히 노동의 이면으로 존재했었다면, 그 빛나는 성취는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예술은 중세에 접어들어 완벽한 신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정교해졌고, 그 정교함이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서는 도시국가를 바탕으로 부를 축적했던 시민 계급의 지원을 받아 꽃을 피웠다. 메디치 가문의 지원이 없었다면 미켈란젤로는 ‘천지창조’나 ‘다비드’ 같은 작품을 창작할 시간에 농사를 지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모차르트의 레퀴엠은 모차르트에게 거액의 작곡비를 지불한 ‘프란츠 폰 발제크 백작’의 이름으로 초연되었다.
모두 알다시피 모차르트는 베토벤과 함께 고전주의 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다.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바흐나 음악의 어머니로 불리는 헨델(둘이 부부?)의 음악은 바로크 음악으로 분류한다. 모든 예술은 시대를 반영한다. 바로크 음악과 고전주의 음악을 구분하는 이유는 음악이 반영하는 시대의 모습이 달랐기 때문이다. 바로크 음악이 왕정 시대를 반영하는 화려한 궁중 음악이었다면, 고전주의 음악은 18세기 후반 미국이 영국과의 독립전쟁에서 승리(1781년)하고, 프랑스 대혁명으로 부르봉 왕조가 몰락(1789년)하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화려한 바로크 음악에 반발해 간결함과 명료함을 추구하면서 시작되었다.
박정희 유신독재 시절, 청춘들은 장발과 청바지, 그리고 통기타를 통해 사회적 억압에 ‘낭만’적으로 저항했다. ‘저항’이 과학적 사회변혁 이론과 결합하면 ‘운동’이 된다. 1980년을 전후해 10•26과 12•12, 그리고 서울역 회군과 5•18 광주 민주화 항쟁을 겪은 청년학생들은 군부독재에 맞설 수 있는 과학적 혁명이론으로 맑시즘을 선택한다. 유신의 잔재는 새롭게 들어선 군부독재의 이익에 따라 이어지거나 대체되었다. 1977년부터 시작된 대학가요제는 이어졌고, 고교 야구는 프로야구로 대체되었다.
난 클래식보다 대중음악을 더 좋아하지만 그건 클래식이 익숙하지 않거나 난해하기 때문이지 특정한 신념이 있어서는 아니다. 얼마 전 민중의례 때 불려지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상황이 달라졌다면 안익태가 작곡한 현재의 애국가를 대체했을지도 모른다는 글을 쓴 바 있다. 혹자는 한 나라의 국가로 불리기에 임을 위한 행진곡은 지나치게 과격해 적절치 않다고 얘기할 수도 있다. 같은 논리라면 프랑스의 부모들은 더 과격한 프랑스 국가를 자신의 아이가 부르지 못하도록 금지해야 할 것이다. 어떤 노래를 애국가로 정할지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한참을 돌고 돌아 결론을 이야기해 보겠다. 결론을 먼저 밝히는 연역적 방식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필자의 귀납적 논리 전개 방식이 불편할지도 모르겠다. 귀납적 방식은 글을 쓰는 사람도 품이 많이 든다. 하지만 연역은 자칫 “답장너”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힘들더라도 피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입장이다.
민중가요는 반독재・민주화라는 시대적 배경이 만들어낸 하나의 문화현상이다. 민중가요가 대중들로부터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누군가 강력하게 민중가요라는 문화현상에 대한 소유권이나 저작권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현충일 추념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조선의용대를 이끌었던 '약산 김원봉'을 언급했고, 보수 야당에서는 대통령이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한 사회주의자를 공식적인 추념사에서 언급했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우리는 해방 이후 이어진 분단으로 인해 항일 독립운동사의 한 축을 의도적으로 지우며 살아왔다. 신념이 다르다고 있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도 문제지만, 신념의 순도를 주장하며 다양한 관점으로 접근하려는 대중들을 배제하는 것 또한 우리가 벗어나야 할 근대의 사고방식이다. 문화현상으로서의 민중가요를 설명하기 위해 추상표현주의를 대표하는 잭슨 폴록의 말을 인용한다.
현대 미술가는 낡은 르네상스 시대의 형식으로 비행기와 원자폭탄, 라디오 그리고 이 시대를 표현할 수는 없다. 모든 시대는 각기 자기 시대만의 방법을 필요로 한다.
- Jackson Pollock -
30여 년 전 우리는 반독재・민주화를 위해 싸웠고, 민중가요는 그 시대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방식이었다. 민중가요가 여전히 유효하다거나, 더 이상 쓸모가 없다는 논쟁 속에서 정작 한 시대를 표현했던 민중가요라는 문화현상은 소멸의 위기에 빠져있는 것은 아닌지... 꼰대로 살고 있는 우리가 민중가요를 내려놓아야 대중들이 민중가요에 쉽게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이제 우리는 민중가요를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래서 언제든, 누구든 필요할 때 다시 꺼내 재창조하거나 들을 수 있게 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바흐나 모차르트, 그리고 비틀즈와 퀸의 음악을 다시 꺼내 듣는 것처럼...
3. 민중가요 소환 콘서트 "the 청춘"에 바란다.
짧게 쓰겠다. 2014년 대형마트(까르푸?) 비정규직 노동자의 투쟁을 그린 "카트"라는 영화가 있었다. 당시 초딩 5학년이었던 딸은 "카트"를 같이 보러 가자며 나를 졸랐다. 아무리 봐도 초딩 딸이 관심을 가질 만한 내용의 영화가 아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당시 큰 딸이 좋아했던 아이돌 그룹 EXO의 멤버(디오)가 영화에 출연했기 때문이었다. 아이돌 그룹의 한 멤버가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과 그 삶과 전혀 무관한 초딩 사이에 다리가 되어 준 것이다.
난 민중가요 소환 콘서트 "the 청춘"이 단지 30년 전 586의 추억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공연이어서는 곤란하다는 생각이다. 쉽진 않겠지만, 책임을 전가할 분명한 대상 없이 경쟁 사회에 내몰려 고통받고 있는 현재의 청춘들이 30년 전 뜨겁게 청춘을 보냈던 지금의 기성세대를 소환해 공연장에 와 주었으면 좋겠다. 함께 공연을 보며 서로의 고단한 삶을 위로하고, 세대 간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는 작은 여지를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다(@back2anal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