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가요 이야기 #9
지난 글 마지막에... 하필, 지금 이 시기에 “the 청춘”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민중가요를 소환하는 의미에 대해 살펴보겠다고 했다.
1. 민중가요 소환 콘서트, “the 청춘”의 소환 대상
먼저 민중가요 소환 콘서트, “the 청춘”이 소환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진짜 민중가요를 소환하겠다는 얘기일까? 아니면, 민중가요를 부르며 시대와 교감했던 당시의 청춘들을 소환하겠다는 의미일까? 소환의 대상은 행위의 주체인 인간이어야 한다. 행위의 주체가 빠진 상태에서 행위 자체에 대해 가타부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도 안 되는 말에 “넘버 3”에 등장했던 욕쟁이 검사 최민식은 이렇게 일갈한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X같아 하는 말이 뭔지 아나? 죄는 미워하되, 인간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야. 정말 X같은 말장난이지. 솔직히 죄가 무슨 죄가 있어? 그 죄를 저지르는 X같은 XX들이 나쁜 거지.
소환의 대상은 정해졌고... 그럼 왜 2020년에 30여 년 전 청춘들을 소환해야 하는지 살펴보자. 우리는 피가 끓어오르는 청춘의 시절, 반독재 민주화를 위해 싸웠다. 최전선엔 화염병과 짱돌로 무장한 CC(혹자는 CC를 Campus Couple 또는, Comedy Couple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전투조 즉, Combat Circle의 약자이다.)가 있었고, 그 뒤엔 전략과 전술을 고민하는 지도부가, 흥을 북돋아주는 문화패가, 총칼보다 더 부서운 펜을 휘갈기는 이론가가 있었다. 담배 연기에 시대의 고뇌를 담고, 소주잔과 팔뚝을 치켜들며 민중과 연대했던 그 당시 청춘들은 그저 100만 청년학도라는 이름으로 반독재・민주화를 외치며 시대의 한 복판에 서 있었다. 마치 일제와 싸웠던 "미스터 선샤인"의 고애신처럼...
양복을 입고 얼굴을 가리면 우리는 얼굴도 이름도 없이 오직 의병이오. 그래서 우리는 서로가 꼭 필요하오. 할아버님께는 잔인하나 그렇게 환하게 뜨거웠다가 지려하오. 불꽃으로... 죽는 것은 두려우나 난 그리 선택했소.
이후 문민정부가 들어섰고, IMF의 소개로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였고, 밀레니엄에 열광하며 지금까지 우리는 숨 가쁘게 달려오기만 했다. 그리고 30년 전 기성세대를 비판했던 그 당시 청춘들은 어느덧 이 사회를 이끌고 있는 오만에 찬 기성세대가 되었다. 아무리 목적이 분명하고, 갈 길이 바빴어도 우리는 잠시 멈춰 섰어야 했다.
옛 고적지에서 ‘요즘 애들은 싸가지가 없다.’는 낙서가 발견되었다는 확인되지 않은 뉴스를 통해 세대 갈등을 일반화시키려는 의도도 있지만, 솔직히 강산에 10년이나 되어야 바뀌고, 평균수명이 대략 40세였던 시대에 세대 갈등이라는 게 지금과 같았을 리 만무하다. 세대 갈등론은 신자유주의의 문제를 세대에게 전가하려는 음모론의 결과이다. 세대 이론가 전상진은 저서 “세대 게임”에서 세대 갈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세대를 겨냥하는 세대 전쟁론적 개혁의 예리한 창은 문제의 구조적 원인, 예컨대 자본, 기업, 그에 기생하는 정치권력과 같은 원인들을 겨누지 않는다. 그런 탓에 세대 전쟁론이 내세우는 청년에 대한 배려는 말잔치에 불과하고, 더 나아가 청년에 대한 선입견이나 편견, 차별을 강화하는데 기여한다.” (p. 81)
"하지만 늙은이들의 사정이 나아진 까닭은 복지 정책이 개선되었기 때문이지만, 젊은이들의 사정이 악화된 것은 복지국가가 그들의 몫을 빼앗아서가 아니라 노동 시장의 상황이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p. 116)
"사실 빈곤 문제는 전통적으로 ‘계급’이나 ‘계층’의 사안으로 다뤄졌다. 하지만 세대 전쟁론자들은 이를 세대의 문제로 새롭게 번역해냄으로써 앞서도 인용했던 레스터 서로우의 묵시론적 예언을 따른다. '가까운 미래에 계급 전쟁은 빈자와 부자의 대결이 아니라 젊은이와 노인들의 싸움으로 다시금 정의될 것이다.'" (p. 118)
"세대가 가진 매력을 활용하여 꾸며진 세대 전쟁론의 도덕적 명확성은 아주 훌륭한 “대량 주의분산 무기”다.” (p. 122)
얼마 전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보며 차라리 남편 공유가 개XX였으면... 하는 생각을 했었다. 동시에 욕을 하면서 막장 드라마를 보던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책임을 전가할 대상이라도 분명하게 존재한다면, 지옥 같은 현실이라도 견딜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그리고 우리의 청춘 시절엔 다행스럽게도 사회적 고통의 책임을 전가할 분명한 대상이 있었다.
우리의 의도와 무관하게 지금의 청춘들은 우리보다 다 더 고통스런 시절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세대 갈등을 부추기는 음모론의 공식에 따라 지금의 기성세대인 우리에게 고통의 책임을 전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억울하다고 투정 부리지 말자. 대부분은 기성세대인 우리가 건설한 세상이다. 더 이상 과거 반독재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던 우리들의 청춘시절을 들먹이며 지금의 청춘들은 도전정신이 없다느니, 네가지가 없다느니 하는 꼰대 짓도 하지 말자. 차라리 뜨거웠던 30년 전의 청춘을 현실로 소환해 책임을 전가할 대상이 없어 스스로를 괴롭히거나 차단된 방구석에서 외롭게 투쟁하고 있는 그들에게 연대의 손길을 보내자. 기성세대와 청년세대라는 자본이 만든 프레임에서 벗어나 30년 전 청춘과 현재의 청춘이 만나 뜨겁게 우정을 나누자. 그것이 내가 생각하고 있는 민중가요 소환 콘서트 "the 청춘"에서 소환하고자 하는 청춘의 의미이다.
다음엔 이어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문화현상으로서 민중가요가 가지는 의미를 살펴보겠다(@back2anal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