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가요 이야기 #3
난 대학 2학년을 마치고 1년 가까이 휴학을 하다가 1990년 11월에 군에 입대했다. 형 둘이 모두 대학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군대에 갔던 터라 집의 관습(?)에 따랐다면 난 89년에 군대에 끌려갔어야 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난 2학년 2학기 때 과대표에 ‘선출’되어 부모님께 양해를 구하고 입대를 한 학기 미뤘던 터였다. 어머니는 내가 과대표가 된 것이 내심 자랑스러우셨던 것 같다. 집안 행사가 있어서 시골에 갔는데, 어머니는 친척들 앞에서 내 자랑을 늘어놓으셨다.
우리 희태가 글쎄 과대표가 되었다네~ 그 왜 반장 같은 거 있잖아~
난 아무것도 아닌 과대표를 이렇게 자랑스러워하시니 학생회장이 되면 더 기뻐하시겠지?라고 생각하며 2학년 2학기 말에 과학생회장에 출마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상대편 후보는 내가 가지고 있는 막강한 여성표가 두려웠는지(^^;) 돌연 후보 단일화를 제안해 왔다. 명분은 각 정파의 선배들이 후보를 임명하는 기존 관행에서 벗어나 내년 학생회를 실질적으로 책임질 88학번들이 토론을 통해 후보자를 옹립하자는 것이었다. 난 찬성했고, 88학번 동기들이 대거 모여 90년도 사업의 기조에 대해 대략 8시간 넘게 진지한 토론을 벌였다. 이제 후보만 정하면 되는데 양쪽 정파를 대표해서 나온 정•부 4명의 후보들 중 선뜻 사퇴 의사를 밝히는 후보가 없었다. 난 학생회장 깜도 아니며 자리에 욕심이 있다기보다는 단지 군대를 연기하기 위해 후보로 나왔으니 먼저 사퇴를 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곤 상대 정파에서도 한 명 사퇴를 해 연합 학생회를 구성하자고 제안했다. 다음 사진은 학생회장 출마를 준비하며 찍은 사진이다.
내가 사퇴 의사를 밝히자 상대방 후보 중 한 녀석이 군대를 가지 않겠다는 전제 하에 사퇴를 하라고 요구했다. 난 최대한 그러겠다고 약속을 했다. 부모님은 나 몰래 학교에 휴학계를 냈고, 난 부모님 몰래 병무청에 입영 연기원을 냈다. 그리고 90학번 후배를 받았다. 90학번 후배들은 89학번과 달리 진짜 후배 같았다(원래 한 학번 터울은 알게 모르게 알력이 있다). 후배들에게 난 휴학 중이니 언제 군대에 갈지 모른다고 말하고 다녔지만 결과적으로느 1년 가까이 버텼다. 휴학생 신분이지만 ‘성대 노래패 협의회’ 의장과 총학생회 산하 창작단인 ‘노래 연구회’ 회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재학생보다 더 바빴다. 심지어 방학 때도 회의를 위해 매일매일 학교에 나왔다. 학기 중엔 회의를 하려니 수업시간을 피해야 했고, 수업 시간을 피하자니 아침 일찍 회의를 해야 했다. 아침 8시에 등교를 해 회의 장소에 가 보면 나 혼자인 경우가 더 많았다. 그렇게 1년을 보내고, 부모님은 영장이 왜 안 나오냐며 소위 빽을 동원해 나를 군대에 보내려고 했다. 병무청에서 전화가 왔다. 10월과 11월 중 언제 입대하겠느냐는 전화였다. 난 당연히 11월을 선택했다. 난 학생운동을 하다가 도망치듯 군대에 가는 선배들이 싫었다. 그래서 입대 전날 머리를 빡빡 밀고 학교에 가 애국적으로 군 생활을 마치고 오겠노라고 인사를 다녔다. 그리고 대략 28개월을 군에서 있었다.
일병이었던 1991년 5월 25일... 외박을 나와 오랜만에 후배한테 전화를 걸었더니 후배는 우리과(국문과) 88학번 김미정 선배가 시위 도중 죽었다며 울먹였다. 미정이는 나와 꼴굿떼라는 노래패를 같이 하며 크게 의지했던 친구였다. 고참들 손에 이끌려 군대에 복귀한 나는 군대 안에서야 국문과 88학번 김미정이 아니라 불문과 88학번 김귀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비겁하게도 난 그 사실에 안도를 했던 것 같다.
시간이 제법 흘러 1993년이 되었다. 국방부 시계는 거꾸로 매달아도 돌아간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듯 어느새 난 제대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군 생활 내내 하지 않던 걱정을 제대 후 부산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몰아서 했다.
복학하면 3학년인데...
이제 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난 애국적으로 군 생활을 하고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잊은 채 졸업 후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동안 받은 학점을 계산해 평점 3.0을 받으려면 얼마나 공부를 해야 하는지 따져 보았다. 남은 과목 올 A+을 받으면 어찌어찌 반올림까지 해서 겨우 3.0은 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당시는 평점 3.0을 넘어야 취직을 할 수 있다는 미신 같은 것이 있었다. 그렇게 내 마음은 동지들이 우글거리는 학생회실이 아니라 도서관을 향하고 있었다.
제대 날짜가 다행히 3월 초라 바로 복학을 할 수 있었다. 제대 후 맞은 93학번 후배들은 90학번 후배들과 또 달랐다. 난 그들의 푸릇파릇함에 이끌려 개강 모꼬지를 따라가게 되었고, 개강 모꼬지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후배가 부르는 노래를 듣고 난 가슴을 망치로 쎄게 얻어맞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때 후배가 불렀던 노래가 바로 “열사가 전사에게”이다.
지금은 나이가 들었는지 "열사가 전사에게"를 들어도 그때만큼의 울림이 있지는 않다. 직장 앞에서 농성을 하고 있는 전철협에서 매일 4시면 투쟁가를 틀어 주는데, 매번 첫 번째 곡이 “열사가 전사에게”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열사가 마치 도서관으로 향하는 나를 지켜보고 있는 듯한 가사로 인해 내 발길은 다시 과방을 향했고, 그해 난 후배들의 강력한 요청으로 어쩔 수 없이 총학생회에서 문화국장까지 하게 되었다. 그때만큼의 울림은 없지만, 그때 내 가슴을 쳤던 그 기억은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내 뇌리에 남아 있는 듯하다.
동지여 그대가 보낸 오늘 하루가 어제 내가 그토록 살고 싶었던 내일,
동지여 그대가 보낸 오늘 하루가 내가 그토록 투쟁하고 싶었던 내일...
열사가 그토록 살고 싶었던 오늘, 우리는 비겁한 꼰대가 되어 이 시대를 활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를 걱정했던 부모님의 그 눈으로 자신의 아이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애써 마련한 아파트 값이 떨어질까 노심초사하며 가짜뉴스의 생산자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