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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백수 채희태 Jan 22. 2020

신세대 민중가요의 시작, "내가 그대를 처음 만난 날"

민중가요 이야기 #20

“민중가요 이야기” 20번째 연재를 시작한다. 이번이 마지막 연재가 될 것 같다. 원래 24회까지 연재할 계획이었지만, “민중가요 이야기”를 쓰게 된 이유가 “the 청춘”의 pre event였기 때문에 콘서트 전에 마무리하기로 되어 있었다. 처음엔 일주일에 2회 연재를 했는데, 계산해 보니 24회가 안 나왔다. 부담을 덜기 위해 연출팀에 24편까지는 안 써도 될 것 같다고 말하니 연재를 주 3회로 늘렸다. ㅠㅠ 미리 10편 정도 써 놓고 여유 있게 연재를 하다가 갑자기 쫓기기 시작했다. 그다음부터는 어떻게 달려왔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https://youtu.be/JnRwfWmbodg​​

노래를 부른 ‘윤미진’의 목소리가 앳되고 청명하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노래는 신세대 민중가요의 시작을 알린 “내가 그대를 처음 만난 날”이다. 1992년에 발매된 ‘조국과 청춘’ 1집에 실린 노래다. 개인적으로 ‘조국과 청춘’ 2집을 정말 좋아한다. 신대철이 이끈 시나위도 2집부터 자리를 잡았던 것 같다. 생각해 보니 “내가 그대를 처음 만난 날”의 작사가, 작곡가, 그리고 노래를 부른 가수까지 모두 나와 작은 인연이 있는 분들이다.

작사를 한 ‘김정환’ 선배는 안기부의 ‘생매장 협박 프락치 강요 사건’의 당사자로, 매우 감각이 뛰어난 연출가였다. 아마 김정환 선배가 연출한 크고 작은 공연에서 우연히 만난 것 같다. 작곡을 한 ‘이지상’ 선배는 몇 년 전 내가 일 하는 지역에서 알게 되었다. 그리고 노래를 부른 ‘윤미진’은 대학시절 노래패 활동을 하며 알게 되었다. 마침 가까이에 있는 이지상 선배를 직접 만나 곡을 만든 사연에 대해 들어 보았다.

이지상 선배(중간)와의 인터뷰를 위해 마련한 술자리. 중간에 곧 8집을 내는 손병휘 선배(왼쪽)가 합류했다.

노래를 만든 특별한 동기는 없다고 했다. 김정환 선배로부터 가사는 자기가 쓸 테니 곡을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가사가 이렇게 말랑말랑할지는 상상도 못 했다고... 이지상 선배는 “통일은 됐어”라는 노래로 통일노래한마당에서 입상을 한 후, 복학생의 삶을 그린 “맏사내 인생” 등의 히트곡을 작곡했다. 그중에서도 오늘 소개할 “내가 그대를 처음 만난 날”은 1992년 대학가에서 공전의 히트를 쳤다. 민중가요 소환콘서트 “the 청춘”을 연출하고 있는 윤미영 감독은 이 노래를 듣고 데모를 하면 남자 친구가 생길 줄 알고 학생운동을 시작했다고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다(진짜?).

“내가 그대를 처음 만난 날” 악보

전에 “전화카드 한 장” 이야기에서 민중가요가 투쟁에서 일상으로 침투해 들어왔다고 소개한 적이 있다. “내가 그대를 처음 만난 날”은 그 시초가 되었던 곡이라고 할 수 있다. 1993년 문민정부의 출범은 학생운동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구호를 외칠 때 “정권 타도”라는 말을 쓰는 게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타도하자”라는 구호 대신 “각성하라” 내지는 “반대한다”을 외쳤던 것 같다.


민중가요도 말랑말랑해지기 시작했다. 과격한 투쟁 일변도의 전대협은 “생활•학문•투쟁의 공동체”를 슬로건으로 내건 “한총련”으로 거듭났다. 1992년인가? 휴가를 나와 후배들과 술자리를 같이 했는데, 한 여자 후배가 나를 “오빠”라고 불러 온몸에 소름이 쫘악 돋았던 적이 있다. 91학번까지는 여자 후배도 남자 선배에게 ‘학형’을 줄여 그냥 ‘형’이라고 불렀다. 90년대 학번부터는 무작정 선배들을 지시에 따랐던 관성에서 벗어나 선배에게 당당하게 자기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1993년 제대를 하고 처음 마련된 후배와의 술자리에서 93학번 한 신입생은 후드티를 입고 와 ‘현진영’의 “흐린 기억 속에 그대”를 춤까지 추며 불렀다(태철이 기억 나나?). 확실히 세상은 군대 가기 전과 변해 있었다. 옆에 앉았던 한 후배가 그 모습을 보고 내게 나지막이 말했다. “형, 적응하시기 힘들 거예요.” 난 속으로 생각했다.

난 너한테도 적응이 안돼...


1993년 4•19 마라톤이 있는 날이었다. 말이 마라톤이지 걷다, 뛰다 하며 성대에서 수유리에 있는 4•19 묘지까지 행진을 하는 가두 집회였다. 이 집회만큼은 정부에서도 허용을 해 주었기에 많은 학생들이 참여했다. 대성로를 내려가는데 총여학생회 간부를 맡고 있는 92학번 후배가 대성로를 거슬러 올라오고 있었다. 난 그 후배를 붙잡고 물었다.


미경아, 4•19 마라톤 참석 안 해?


어, 오빠... 나 오늘 깜박 잊고 후배랑 약속을 했는데, 4•19 마라톤에 참석하는 것보다 후배와 약속을 지키는 게 더 중요한 것 같아서요.


확실히 신세대 후배는 우리와 달랐다. 그 전 같았으면 당연히 약속을 깨고 집회에 참석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놓친(?) 후배들은 또 얼마나 될까? 난 그 당찬 후배의 주체적인 결정을 지지해 주었다. 복학한 동기들은 요즘 후배들은 투쟁을 하는 건지, 노는 건지 모르겠다며 푸념을 했다. 난 후배들을 변호했다. 그 친구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주체적으로 고민하며 운동을 하고 있다고...


다시 이지상 선배와의 인터뷰를 빙자한 술자리로 돌아오자. 사실 노래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하지 못했다. 노래 이야기보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이지상이라는 이름이 본명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3년 이후에도 학생운동을 한다는 것은, 그리고 민중가요 음반을 낸다는 것은 여전히 위험한 일이었다. 문민정부라고는 하지만 그 뿌리는 군사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은 민정당이었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노래 가사에 대한 사전검열이 있었던 때라 불법음반에 본명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만든 가명이 ‘지하’가 아닌 ‘지상’이었다고 한다. 이름에서 알 수 없는 포스가 느껴졌는데 그러한 비하인드가 있었다. 본명을 얘기하면 이지상 선배가 지금까지 쌓아왔던 이미지에 누가 될지도 몰라 따로 밝히지는 않겠다. 이제는 심지어 집에서도 ‘지상’이라고 불러서 아예 개명을 할 생각이라고 했다.


“내가 그대를 처음 만난 날”이 발표된 즈음부터 대중들이 함께 따라 부를 수 있는 많은 노래들이 쏟아져 나왔다. 노래방에도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바위처럼”을 비롯, 대학생들의 학생회 생활을 그린 “청춘 왈츠”, 진로의 아성에 도전한 소주 브랜드와 같은 제목의 “처음처럼”이 바로 그런 민중가요들이다. 민중가요는 전성기를 지나며 많은 창작자들을 배출했고, 민중가요가 소비되는 가장 큰 시장인 투쟁의 현장이 예전 같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 민중가요의 변화에 민중가요가 민중가요 답지 않다고 투덜대는 사람도 없지는 않았으리라...


내가 1989년에 과에서 만든 민중가요 노래패 ‘꼴굿떼’는 2000년대 초반까지 고집스럽게 민중가요를 부르면 생존해 있었다. 난 졸업 후에도 매년 후배들의 정기 공연을 보러 갔었는데, 한 번은 후배들이 정말 쎈 투쟁가를 중심으로 공연을 하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난 후배들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선배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공연이 아니라 너희들의 삶을 공연에 담았으면 좋겠다고...


난 2000년 12월 3일 결혼을 했는데, 결혼식 축가는 당연히 꼴굿떼 후배들의 몫이었다. 합창, 듀엣, 독창, 그리고 마무리 합창까지... 20분이면 끝날 결혼식이 40분이 넘게 걸렸다. 그런데 후배들이 선곡한 결혼식 축가는 다름 아닌 “대결”이라는 노래였다. 노동자와 자본가의 대결을 다룬 노래로 가사에 “X새끼”라는 욕이 나올 뿐만 아니라 4절까지 있는 긴 노래였다. 후배들이 각 잡고 전주 부분을 부르는데 난 식은땀이 흘렀다.

아, 후배들이 이런 식으로 원수를 갚는구나!
후배들의 축가... 곡목은 민중가요, “대결” 결혼해서 싸우라고? 왼쪽부터 00 백록이, 가리온, 97 지수, 00 호진이, 남희, 선화, ??, 표향이, 선정이, 승주, ??

민중가요는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했지만. 대중들은 조금씩 민중가요을 떠나기 시작했다. 지금도 가끔씩 다양한 투쟁의 현장에서 민중가요가 불려진다. 자신의 절박한 처지를 민중가요에 담아 부르는 경우도 있지만, 때때로 자신의 이익을 강하게 주장하기 위한 도구로 민중가요를 ‘간택’하기도 한다. 민중가요로 포장한다고 모두 진보는 아니며, 모든 투쟁이 정의로운 것도 아니다. 난 민중가요의 본질은 투쟁이 아니라 시대에 대한 공감과 인류에 대한 사랑, 그리고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이라고 생각한다.


3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인류는 시대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기에 역부족으로 보인다. 시대라는 수레바퀴를 굴리는 것도 인간이고, 그것을 멈출 수 있는 것도 인간이다. 그것이 인간이 만들어 온, 그리고 만들어 갈 역사이다. 어쩔 수 없다고 계속 벼랑 끝으로 향하지 말자. 차라리 솔직하게 부실하고 나약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주변에 있는 모든 이에게 연대의 손길을 내밀자. 나이가 많건 적건, 성과 인종, 그리고 서로가 추구하는 신념이 같건 다르건...


마지막으로 문화 상대주의를 개척한 프랑스의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남긴 명언으로 “민중가요 이야기”의 공식 연재를 마무리 하겠다.


인간은 언제나 똑같이 잘 생각해 왔다.


P.S

다음 연재는 “민중가요 이야기” 에필로그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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