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가요 이야기 #21
잠시 내려놓았던 펜을 다시 들었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민중가요 이야기” 연재가 끝난 후, 뒤늦게 “민중가요 이야기”를 역주행하며 읽어 내려간 한 독자가 마지막 글(사실은 연재 첫 번째 글)에 이 노래가 없어서 서운했다는 댓글을 남겼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피폐해진 내 멘탈을 추스르고 싶어서다. 내가 50을 넘게 살아 봤지만, 먹고 싶은 반찬 나중에 먹으려고 아껴 두면 딴 사람이 집어가고, 하고 있는 일 때문에 하고 싶은 일 미룬다고 누가 알아주지 않는다. 한 마디로 참으면 똥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하고 싶은 거 있으면 참지 말고 그냥 다 하면서 살기 바란다. “민중가요 이야기” 연재는 “the 청춘”의 요청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일 중 하나가 되어 버렸다.
사실 “새 세대 청춘송가”는 연재 리스트에 있었던 강력한 후보 곡이었다. 그런데 “the 청춘” 콘서트 일정에 맞추느라 연재가 계획되었던 24회에서 20회로 줄고, 중간에 계획에 없었던 민중가요들이 끼어들면서 공식(?) 연재에서 밀려 버렸다. “새 세대 청춘송가”는 민중가요의 위대한 작곡가 ‘윤민석’ 선배님(얼마 전에 페북에서 인사를 주고받았으니 앞으로 눈치 안 보고 선배님이라고 부르겠다. ^^)이 노랫말과 가락을 만들었고, ‘조국과 청춘’ 3집에 수록된 노래다.
누구나 자신의 인생을 바꾼 노래가 있다. 아마 90년대 초반 학번이라면 이 노래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유는 첫 소절 가사가 주는 임팩트 때문이다.
내가 철들어간다는 것이
제 한 몸의 평안을 위해
세상에 적당히 길드는 거라면
내 결코 철들지 않겠다.
윤민석 선배님은 가락만큼이나 가사를 뽑아내는 실력도 탁월하다. “애국의 길”에서는 청년학도들에게 후손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투쟁의 대열에 함께 할 것을 독려했다면, “새 세대 청춘송가”에서는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인 이 세상에 길들여지지 말 것을 당부한다.
모두가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세상과의 타협을 시작한다. 문제는 어쩔 수 없다는 그 핑계가 대부분 절박한 생존이 아니라 이익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세상에 길들여진다. 더 비싼 아파트에 살기 위해, 더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이 소속된 전문성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오늘도 어쩔 수 없이 우리가 싸워야 할 세상의 단단한 구조물이 되어 가고 있다.
그뿐이면 그나마 다행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나는 어쩔 수 없어도 너는 어쩔 수 없으면 안 된다는 고약한 심뽀다. 가진 자가 가진 것을 포기하는 것은 가지지 못한 자가 그것을 요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누리는 것은 포기하지 않고 남이 누리는 것을 탐하거나, 또는 포기하라고 요구한다. 이른바 기계적 평등에 대한 요구이다.
그리스•로마 신화에 보면 심지어 신들도 불평등한 존재로 등장한다. 물론 그리스•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신은 그 당시 지배계급의 메타포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존재로 살아간다. 그 다름이 시대에 따라 불평등으로 작용한다.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모든 존재가 완벽하게 평등했던 시절은 없었고, 인류가 종말을 맞이하는 그날까지도 기계적 평등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잘난 절대 이성은 그 꼴을 인정하지 않는다. 불평등한 구조를 옹호하자는 것이 아니다. 불평등을 요구하는 방향이 밖이 아니라 먼저 자신을 향해야 한다는 말이다. 어른으로서, 남자로서, 인간으로서 나는 평등에 어긋나 과도하게 누리고 있는 무엇인가가 있지는 않은지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적어도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은 그런 시대다.
‘철들다’는 말은 원래 농경시대의 유물이다. 농부가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거름을 주어야 할 철을 알지 못하면 농사를 망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철없다는 말은 아마도 농사를 통해 축적하여 시스템화 된 경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비난하면서 시작된 말일 것이다. 지금은 농경사회가 아니므로 철을 몰라도 된다. 몰라도 어른이 아닌 산업사회의 시스템이 어른보다 도 정확하게 철을 알려준다. 언제 일어나야 하는지, 언제 학교나 직장을 가야 하는지, 언제 점심을 먹어야 하는지...
때때로 자본은 과잉소비를 부추기기 위해 이 철을 이용한다. 이른바 시즌 마케팅이다. 우리가 이 시대의 모순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집단적으로 철들기를 거부해야 할지도 모른다. 간디가 마을이 세계를 구할 것이라고 예견한 것처럼 윤민석 선배는 1990년대 초반에 철이 든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통찰한 것은 아닐까? 아니면 그 당시 우리의 부모 세대들이 “데모도 한 철”이라는 말로 군대 갔다 오고, 사회생활하면서 저절로 사그러 들 것이라고 하는 비아냥에 대응해 노랫말을 썼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 또한 “새 세대 청춘송가”를 들으며 언젠가부터 철들기를 거부하며 살게 되었고, 어느덧 반백의 나이가 되어 버렸다. 윤민석 선배님은 이 노래로 인해 50이 넘도록 십 대의 정신연령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게 일말의 책임감을 느끼...실 필요는 없다. 난 누가 뭐라든 그러한 삶에 만족하며 살고 있고, 또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동기를 주심에 그저 무한히 감사하고 있으므로...
이제 쓸데없는 글 말고 노래에 직접 빠져 보자. 백만 청년학도를 한방에 철부지로 만들었던 ‘조국과 청춘’의 “새 세대 청춘송가”!!!
post script...
이어서 다음 글은 “새 세대 청춘송가”를 통해 알아보는 윤민석 스따일의 투”쟁가”에 대해 쓸 생각입니다. 다소 전문적인 음악용어가 등장할 예정이라 재미는 없겠지만 더 “집~쭝”을 해서 읽어주시길... 그나저나... 김사부님의 건강이 걱정이네요. 빨리 완쾌하셔야 할텐데...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