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 상 "주인 할머니"라고 칭하고 있는 임대인은 40년대 생 어르신이다. 아무래도 세대차이가 있어서 그런가? 이해관계가 당연히 다르다지만, 자취 생활을 10년 넘게 해왔음에도 처음 보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인생의 반 이상을 혼자 살았다. 경력이 제법 되었기에 집을 보는 데에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집과 이 집의 주인 할머니를 만난 날 내 세상이 무너졌다.
계약 전 마음을 정하기 위해 이 집을 둘러보는데 아무래도 오래되었다 보니 몇 가지 다듬어야 할 것들이 보였다. 욕조 배수구 입구가 녹이 많이 슬어있었고 신발장이랑 싱크대 문이 몇 개 삐뚤어져 있었다. 큰 문제는 화장실과 베란다였는데, 화장실은 고장 난 곳은 없었지만 지저분하고 낡은 티가 났고 베란다는 타일이 여럿 깨져 걸어보면 덜그럭거리는 게 느껴졌다. 누군가 임시로 보수해서 덕지덕지 실리콘을 발라 놨는데 그 바람에 바닥이 오히려 울퉁불퉁해진 것 같았다.
그러나 당시 예산에 맞는 집이 몇 없었고 전세 대출이 가능한 집은 더더욱 없었기에 선택권이 거의 없긴 했지만, 당시 나는 이 집의 환한 기운과 널찍한 공간이 꽤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거리낌은 없었다. 이 면적에 이 가격이라니, 낡은 화장실 정도는 감수하기로 하고, 명확하게 '고장 난' 것들은 고쳐 주겠다고 하면 계약을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계약 협상을 하러 간 날. 주인 할머니는 푼수 같고 오지랖이 넓어 보였지만 좋게 보면 귀여울 수도 있는 사람이었고, 인심 좋게도 같이 나눠 먹자면서 땅콩과자를 한 봉지 사들고 오셨다. 근처에 살고 있고 따님도 근처에 있으니 가끔씩 반찬도 해다 주겠다고 사람 좋은 소리도 하셨다. 계약 조건을 얘기하니 역시나 화장실은 고장 난 데가 없으니 고쳐주지 못하겠다고 하셨지만 망가진 곳들은 수리해 주겠다고도 하셨다. 당연히 살 만하게 고쳐 놔야지, 내가 싹 돌아보고 고칠 건 고쳐놓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면서.
화장실은 못내 아쉬웠지만 도배랑 장판도 못 해준다는 서울의 전세 인심에 큰 기대를 안 하고 있긴 했다. 대신 내가 직접 집수리를 해도 된다는 특약을 추가하기로 했다. 그리고 다른 곳들은 내가 입주하기 전에 주인할머니가 보수해 주는 걸로, 하나하나 특약사항을 작성했다. 삐뚤어진 신발장 문이랑 싱크대 문 고쳐 주기, 녹슨 욕조 배수구 갈아주기, 그리고 베란다 타일 보수해 주기. 나는 몹시 흡족한 마음으로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살던 집을 부동산에 내놓겠다고 연락해 이사 날짜까지 맞춘 뒤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집에 오는 길에 선물 받은 카드 지갑을 잃어버렸다. 내 평생 아무리 술에 취해도 물건을 잃어버린 일이 없었는데, 이건 아마도 플래그였을까?
공실이었던 집이라, 사람이 없으니 집이 망가지는 것 같다면서 주인 할머니가 먼저 이사 전에 집에 오가면서 좀 돌봐달라고 부탁하셨다. 마침 고칠 게 많은 집인데 잘 됐다 싶어서 입주 전 수리에 대해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 화장실 청소를 위해 그 집에 찾아갔던 날, 주인 할머니는 특약에 있던 베란다 수리 견적을 받으려고 동네 타일 집 사장님을 부르신 듯했다. 두 분 모두 목청이 좋으셔서 듣고 싶지 않아도 두 분의 대화가 너무 잘 들렸다. 타일 집 사장님은 이건 다시 붙일 수가 없다, 뜯고 다시 발라야 한다는 설명을 하고 계셨고, 주인 할머니는 생 사기꾼이 다 있다고, 그 돈을 주고 어떻게 베란다를 수리하냐고 화를 내고 계셨다.
나는 운이 좋았다. 그동안 멀쩡한 임대인들만 만나왔으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대화를 들은 후 슬쩍 부동산 사장님께 연락해서 특약사항은 꼭 지켜지도록 신경을 써달라고 부탁을 드렸더랬다. 이 부동산 사장님도 참 요령이 없는 건지 날 엿 먹이려는 건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또 주인 할머니한테 전하면서 수리를 당부하는 바람에 주인이 하는 일을 왜 옆에서 듣냐고, 그건 니가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 그걸 또 부동산에다가 얘기했다고 잔소리를 쏟아부었다. 그게 그렇게 싫었으면 내 앞에서 말을 하질 말던가. 하아.
하루는 짐을 가져다 놓으러 잠시 이사할 집에 들렀는데, 용달 기사님께서 베란다를 몇 발짝 걸어 보시더니 여기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아서 세탁기는 못 놓겠다고 하셨다. 찝찝한 마음에 화장실 타일 덧방을 하러 와주신 사장님께서 집을 보러 오셨을 때 베란다 상태를 잠깐 봐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그분도 잠시 보더니 이건 부분 보수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닌 것 같다고, 타일 아래에 접착제가 다 떨어진 것 같아서 바닥 전체를 새로 바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셨다. 수리하러 오신 사장님께 그렇게 호통을 친 주인할머니가 과연 이 심각한 상태의 베란다를 제대로 정리나 할는지 걱정이 앞섰다.
그 이후로도 주인 할머니는 더 저렴하게 베란다를 수리할 방법을 고민하는 듯하더니, 갑자기 나에게 전화를 해서 이번 주엔 베란다를 수리하러 갈 테니 들어가질 말라고 했다. 그런데 남편분과 직접 수리를 하겠다는 거다. 분명 타일 시공해 주시는 분께서 이건 본드를 덧발라서 해결되진 않을 거라고 했는데 대체 어떤 수리를 하려고 그러는 걸까, 조금 걱정스럽긴 했다. 이틀쯤 후 주인할머니에게 베란다는 본드가 덜 굳을까 염려되니 들어가지 말라는 말과 함께 자유롭게 드나들며 집수리를 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남편분이 베란다를 수리하다가 손을 베이기까지 했다는 생색과 함께.
대체 어떻게 했을까, 세탁기는 제대로 놓을 수 있을까 걱정하며 찾아간 집에서 발견한 광경은 어마 무시했다. 망할 주인할머니 부부는 타일을 새로 깔기는 아까워 죽겠는지 아주 두터운 매트를 타일 위에 잘라서 깔아놓았다. 두꺼운 매트를 베란다 모양에 맞춰 자르느라 손을 베인 거였나 보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그러면서 장식용으로 좋다면서 빈 와인병과 와인 상자를 가져다 놓았는데 이거 그냥 쓰레기 버려놓은 거 아닌가요? 잃어버린 내 인류애는 어디서 다시 찾을까요?
베란다는 당연히 수습불가였다. 이미 고르지 못한 바닥에 매트를 깔아 놓았으니 수평이 맞을 리 없었다. 도저히 세탁기를 놓을 수 없는 상태라 다시 한번 부동산에 연락을 드렸다. 이건 특약사항이었는데 이게 뭐냐고. 사실 부동산에서도 크게 할 수 있는 게 없긴 했다. 강제로 특약사항을 집행하게 할 권한이 있는 건 아닐 테니까. 여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계약 미이행으로 계약금을 돌려받고 다른 집을 구하는 거였는데 다른 집을 구하는 것도 막막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 계약 미이행을 분쟁신고 위원회에 고발해서 결론을 얻어내야 한다는 거다. 그동안 나는 어떡하냐고. 현실적으로 이미 계약을 한 뒤에 발을 빼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다.
그나마 부동산에서 설득해 주신 덕에, 그리고 실사를 부탁드렸던 타일 시공업체 사장님께서 흔쾌히 주인할머니의 전화를 받아 설명을 해주신 덕에 타일 덧방까지는 안 하더라도 베란다의 기존 타일만이라도 철거하기로 했다. 타일 접착제로 쓰이는 급결까지는 타일 사장님께서 최대한 깨끗하게 제거해 주겠다고 하신 덕이었다. 이 일이 일어난 게 불과 이사 일주일 전이었는데, 타일 사장님께서 내 이사 날짜를 듣고 다른 일정을 조정해 하루를 빼서 작업을 해주시기까지 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주인할머니는 철거비를 내는 게 너무 아까웠던 모양이다. 견적에서 10만 원을 빼고 돈을 주었다. 이래야 부자가 되나 보다. 마음씨 좋은 타일 사장님께서 내 돈을 받고 싶진 않다며 견적을 깎아 주셨다. 나에겐 은인이 아닐 수 없었다. 얼마나 감사하던지.
하다못해 베란다 수리를 하겠다며 집에 들어오지 말라고 이야기한 날짜도 가관이었다. 입주 전이니 당연히 사전에 집수리 일정 하나하나 연락을 드리고 허락을 받은 뒤 진행했는데, 이미 협의한 일정도 마음대로 직전에 취소해 버렸다. 처음엔 나도 이야기했다. 사전에 수리 작업을 하겠다고 말씀드리고 업자분 방문 일정을 잡아 둔 날짜라고. 어이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이 집주인인데 말이 많네. 내 마음대로 하면 되지. 주인이 하라는 대로 해요."
나의 고난이 이 정도에서 끝났다면 글을 쓰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철거 작업 날, 타일 사장님께 다급하게 연락이 왔다. 사실 아쉬운 대로 망가진 타일을 철거만 하고 맨바닥에 주인할머니가 주고 간 매트를 깔 생각이었기 때문에, 작업 중에 추가로 확인이 필요할 일이 없어야 했다. 그런데도 여러 차례 울리는 전화에 예감이 좋지 않았다. 결국 회의를 하던 중임에도 불구하고 양해를 구하고 잠시 나와 연락을 받았다. 사장님의 첫마디는 이거였다. "아니, 제가 이 일만 계속했는데, 이런 베란다는 정말 처음 봐요! 빨리 제가 보낸 사진 좀 봐주세요!"
베란다가 흔들린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언제, 어떤 미친 사람이 이런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베란다와 거실의 단차가 불편했을지도 모르겠고, 바로 덧방을 하자니 멀쩡한 기존 타일이 아까웠던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타일 덧방을 하긴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베란다 타일 위에 나무로 구조체를 세우고 그 위에 합판을 얹어 바닥을 만든 뒤, 그 위에 타일을 붙인 것이다. 이 위에 전 세입자가 세탁기를 두고 썼으니 진동이 가해졌을 것이고, 빗물과 세탁기에서 나온 물로 습기를 머금은 합판이 썩기 시작하면서 바닥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타일 밑에 합판이라니, 그 말을 들은 뒤 회사에서 남은 근무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겠다. 그간의 스트레스에 사진을 보고 놀란 마음이 더해져 심장이 요동치고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주인 할머니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주기로 한 수리비가 있으니 거기서 알아서 하고, 방수 코팅제 바르는 거 쉬우니까 사다가 좀 발라요." 이게 뭐람, 하하하.
어쨌든 덕분에 맨 콘크리트 바닥에 매트를 깔고 베란다를 쓰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혹시라도 바닥이 내 예상과는 달리 고르지 않거나 다른 문제가 있을까 봐 셀프 바닥 몰탈 시공을 공부하고 있었는데(바닥 미장, 평탄화 작업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그 정도까지 하진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었다. 오히려 멀쩡하고 이 집에 더 잘 어울리는 오렌지색 타일이 나타났으니 차라리 후련하고 좋았다(구옥 타일이라 아주 단단하게 붙어있다.) 철거 작업이 끝난 날은 이사를 사흘 앞둔 날이었다. 짐을 제자리에 놓기 위해 베란다를 이사 전에 가다듬어야 했기에 또다시 퇴근하고 들러 베란다를 청소하게 됐다. 이땐 정말 정신력으로 한 것 같다.
베란다 말고 다른 특약사항들은 잘 이행했냐고? 그럴 리가. 기회가 된다면 다른 것들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풀 날이 오겠지. 이 글이 법원 제출용 문서는 아니니까 오늘은 베란다 에피소드에 대해서만 쓰는 걸로 충분할 것 같다. 그리고 난 매일 기도한다. 이제 더 이상 이 집에서의 서프라이즈는 없었으면 좋겠다고.
근데 얼마 전에 전세 보증 보험 가입 후 증명 서류를 받은 주인 할머니에게 냅다 전화가 왔다. 집이 이제 살기 편해져서 계약 만기되면 딸한테 살라고 하고 싶었는데 이 서류는 뭐냐면서. 이 투명하고 못 돼먹은 임대인 같으니라고. 집 없는 설움이라는 말의 의미를 절절히 깨닫는 요즘이다. 나는 또 계약 갱신권 같은 것에 대해 공부하며 하루를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