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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문을 찾아서

by 이종민

문득 거리에서 문이 사라졌다 여긴 건 슬픈 일입니다. 빠른 변모에 당황한 내 발이 길을 잃었다기보다는, 내장을 드러낸 건물 유리벽과 같은 것들 때문입니다. 그것들의 뻔뻔한 도발은 마치 거기로부터 비쳐 나오는 처녀의 허연 허벅지만큼이나 민망하고 당황스럽습니다. 그때마다 내게 문은 도구가 아니라 하나의 의미가 됩니다.

나는 지극히 기술적인 관점으로 문을 관찰하기도 하지만, 때론 ‘오귀스트 로댕’이 조각한 '지옥문'을 떠올리며 문이 지닌 무게에 놀라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문은 종교와 기능과 형태라는 개별성을 넘어, 무어라 말할 수 없는 하나의 통합된 의미로 구축됩니다. 따라서 내게 문은 건축이기보다는 문학에 가깝고, 실체라기보다는 상징으로 존재합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듯이, 나 또한 별 의미를 두지 않고 매일 문을 열고 닫습니다. 문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문에 관한 어설픈 나의 질문 또한, 무질서한 이 시대의 거리처럼 두서없는 주장으로 끝나게 될 공산이 큽니다. 하지만, 내 인생의 어느 시점을 통과하던 때에 열었던 몇 안 되는 문(門)이 있었음은 분명합니다.

오래전, ‘앙드레 지드’의 소설 ‘좁은 문’을 읽은 후부터 ‘내게 문은 어떤 의미인가?’라는 첫 질문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소설 속에서 문을 통하여 공간이 전이되는 경험을 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이는 공간의 경계에는 항상 문이란 것이 있어서 안과 밖을 통제한다는 보편적인 내 인식이 한 발짝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실체의 문이 부재함에도 공간의 변화와 층위를 알게 되었으니 그게 바로 ‘문’이 아니고 무엇이었겠습니까? 물론 감각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차원이었지만요.

공간(空間)의 경계란 때론 숭고한 의미를 내포합니다. 말하자면, 새로운 공간에 드는 행위란 경험치 못한 다른 세계를 만나는 것이며, 이는 짐작하고 동경하였던 여태까지의 사유의 방향을 더욱 확고하게 하거나 정제시키는 행위일뿐더러, 때에 따라서는 삶의 방향을 슬쩍 바꾸기도 하는 매우 극적인 일입니다. 따라서 다양한 공간에 대한 호기심과 욕구는 삶의 의미 있는 절차입니다.

이후로 나는 언제나 새로운 공간을 갈망했고, 그 경계에는 늘 보이지 않는 작은 문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부터 내게서 ‘문’이란 단어는 사물을 지칭하는 보통명사가 아니라 어떠한 정신을 이루는 추상명사가 된 것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흥미로운 질문이 되곤 하는, ‘존재하여야만 문이라 할 것인가?’라는 의문의 실마리는 아무래도 ‘소쇄원’ 담장의 벽에 뚫린 물도 흐르고 사람도 드나드는, 그리하여 애써 문이 되고자 아니 한 작은 통로에 있었습니다.

나는 그날의 비망록에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뚫린 부분을 문이라 주장한다 해도 그건 허공이며 무(無)이다. 그에 반하여 그 옆의 벽은 실체이며 유(有)이다. 그럼에도 그 무(無)는 문이라 불림으로써 엄연히 존재한다. 유(有)인 벽 또한 무(無)인 문이 존재하지 않으면 진정한 벽이 되지 못한다. 때론 배경이 그림을 더 확고하게 한다.’

또한, 무(無)였던 소쇄원의 문을 통과하며 생각했습니다. ‘삶이란 자칫 하나의 틀 속에 그림으로 갇히는 소극적 행위이다. 그리하여 보편적인 삶은 고정된 실체가 되기에 급급한 것이 아닌가? 그림이 틀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그리하여 삶 자체를 하나의 배경이 되어 바라볼 수 있다면......’

내 생각을 받아 존재하지도 않는 문이 내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너는 문이 될 터인가? 벽으로 남을 셈인인가?’ 그 순간 나는 보이지 않는 큰 문지방 하나를 건너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여전히 문은 내 주위의 곳곳에 있습니다. 다만 내가 보지 못할 뿐입니다.


반면, 존재하지만 문이 되지 못하는 문에 대한 질문이 있을 법도 합니다. 엉뚱하지만 ‘통과하지 않아야 할 문도 있는가?’ 라는 의문입니다.

범어사 대웅전의 문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부처님을 뵙기 위해서는 정면으로 열어 놓은 문을 피하여 옆으로 난 쪽문으로 들어야 합니다. 꽃 그림이 새겨진 그 아름다운 정면의 문은 사람을 위한 문이 아니라, 부처님을 더 전능한 대상으로 존재시키기 위한 수단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문이 됩니까?

통과되지 않을 문이 과장 된다는 것은, 반대로 사람이 드나들어야 하는 문은 한없이 인간다워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종교의 문은 별개입니다만, 주변에 드나들 수 없는 문이 많아진 것은 슬픈 일입니다. 무시하는 문, 위협하는 문, 차별하는 문, 심지어 쫓아내는 문.


라파엘로'의 그림 '아테네 학당'에 보면, 아카데미의 커다란 정문 앞에 방만한 자세로 앉은 '디오게네스'의 모습이 보입니다. 거대한 문과 대적할 만한 자신이 있는 인간의 당당한 자세를 보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큰 아카데미의 출입문은 하나도 과장되어 보이지 않았습니다. 큰 문은 오히려 인간에 압도됩니다.

문은 사람의 것입니다. 거리의 문을 살피다 보면 관계된 사람들이 그려집니다. 문을 만드는 것도 사람이지만, 문을 여는 것도 사람입니다. 이 작은 생각 때문에 문이 어떤 모습으로 서 있어야 할 것은 자명해집니다. 문은 사람이 열고 다닐 곳입니다.

더러 문을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고, 문의 너머가 그저 그럴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문의 너머란 늘 비밀스러운 것인가?’는 그런 사람들에겐 던져볼 만한 질문입니다. 꼭꼭 닫혀있는 문은 분명 유혹입니다. 문이 거기에 있음으로써 만들어 줄 새로움에 관한 기대 아니겠습니까? 이쪽이야 벌써 나와 육화(肉化)됨으로서 이미 진부한 공간일 터인데, 문의 너머 저쪽에는 도대체 무엇이 숨겨져 있으며, 어떤 흥분을 내게 줄 것인가?


하물며, 올라야 도달할 수 있는 문이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언덕의 꼭대기가 보이는 억새 숲에 서면, 그때마다 한 마리의 어미 연어가 된 심정이었습니다. 저 높은 곳에 놓인 미지의 문을 향하는 배가 찬 연어의 몸짓은 얼마나 처절할 것입니까? 십중팔구 찰나로 끝이 날 환희의 순간과 이어서 도래할 또 다른 공간과의 육화에 대한 허무가 결국 나를 실망하게 할 것이지만, 나는 억새의 관능을 위로 삼아 긴 육체의 고통을 기꺼이 감수하기로 합니다. 거기에 내가 들어가야 할 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닫힌 문과 올라야 하는 문은 언제나 비밀스럽고 도도한 자세를 지닙니다. 그리하여, 열려는 자와 오르려는 사람에게 문의 너머란 짙은 오르가즘에 대한 동경입니다. 그때마다 ‘문의 비밀’은 새로운 유혹이 됩니다.

거리에서 제대로 된 문을 찾는 이유는 그 외에도 많습니다. 문 또한, 내가 짐작하지 못할 여러 가지의 모습으로 곳곳에 숨겨져 있습니다. 새로운 문을 찾으려는 나의 여정은 매일 계속될 것입니다. 삭막한 거리가 발길을 힘들게 한다 하여 그칠 일은 더더욱 아닙니다. 거리가 아름답다고 느끼던 오래된 날의 관찰 하나를 덧붙이겠습니다. 여러분께서도 혹시 잃어버린 문이 있었다면 어서 찾으시길 바랍니다.


문의 얼굴

거리를 지나다 우연히 쳐다본 집에 들어가 보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면, 혹은 먼발치에서 바라본 집이 언젠가 들어가 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면, 분명히 문門이 말을 걸어왔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있다면, 슬쩍 한 번 들어가 보세요. 문 혹은 그 문이 속한 집과 모종의 즐거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지 모를 일입니다.

좋은 집은 사람의 모습을 많이 닮았습니다. 사람의 모습이 보기에 가장 편하기 때문입니다. 집의 앞모습을 사람의 얼굴이라고 가정한다면, 문은 입에 해당한다고나 할까요? 물론, 마구 먹어대기만 하는 게걸스런 입이 아니라 이야기하고 표정을 담아내는 예쁜 입말입니다. 잘 만들어져서 제자리에 달린 문은 여인의 입술만큼이나 아름다운 유혹입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열고 닫아야 하는 문의 역할은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것과 바람이나 열기, 혹은 벌레나 짐승 같은 것들의 공격에 대한 보호수단에 그치지 않아야 합니다. 거대한 성문城門에서 부터 부엌의 쪽문에 이르기까지 문의 더 참된 역할은 주인主人으로서 객客을 맞아들이는 첫 시작으로서의 의미에 있습니다.

예컨대, 첫인상이며 예禮의 표현이었던 문은 지금도 건축의 공정 중에서는 제일 뒤에 마무리하는 공정이며, 건축가는 최종적으로 이 문의 부착으로 집의 조화를 완성하려 합니다. 이른바 문은 화룡점정畵龍點睛의 역할을 기꺼이 떠맡을 만한 것입니다. 문은 거리의 얼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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