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층에 기거하고부터, 도시의 거리를 내려다보는 일은 한 장면의 파노라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삶의 확인이 되곤 한다. 여름이 오면 휴양지인 이 도시는 그야말로 북새통이 된다. 탈출의 현장을 긴급 타전하는 텔레비전 리포터의 말을 무색하게 하는 풍경 아닌 풍경이 내 집 몇십 미터 아래에서 매일 펼쳐진다. 이러한 삶의 분주를 보고 있노라면, 뜬금없이 고공의 고독으로부터 탈출은 물론 이 집단 행렬에 동참하고픈 에너지의 충동을 덩달아 느끼는 것이다.
가다 서기를 반복하며 꼬리를 문 자동차의 행렬은 마치 가두리 양식장의 그물 장막을 따라 도는 성질 급한 물고기의 회유라 할까? 조련된 듯이 한 방향의 질주에 저마다 몰두한다. 밤의 광경은 더욱 볼 만하다. 꼬리에 빨간 노란 불을 달고, 마치 자궁을 향하여 헤엄쳐 가는 정충의 무리 같기도 하다. 나는 인류 시원(始原)과 생물적 본능을 연상한다. 다르다면 무척 느린 속도 정도가 아닐까?
하지만 나는 그 느림을 동정하며, 차 안의 풍경을 그려본다. 보채는 아이와 달래는 아내, 그리고 묵묵히 핸들을 잡고 있을 남편. 그렇지 않으면 계절의 유혹에 들뜬 처녀, 총각의 재잘거림이거나. 그들은 몇 시간 후의 기대를 저마다 안고, 이 답답한 행보를 꾹 참아내고 있을 것이다. 수년 전 나도 엄연히 저 행렬에 속해 있었다. 무모하고도 지루한 행렬에 종종 짜증을 내기도 하였지만, 지금은 아름다운 풍경으로 떠오르니 나이 탓인가?
몸이 느려진 이즈음, 정신적 무장과 관조로 나를 포장하고 여름나기를 고대하였다. 가령 이광수가 산중일기에서 표현했던 단어 쇄락(灑落)이나, 연암의 글벗이 누렸던 탁족(濯足)의 즐거움 따위를 이 고공의 방에서 상상하는 것이다. 또한 십수 년 전 여름, 소쇄원 광풍각에서 바라본 초록의 향연이나 독락당 계정의 창 너머로 들리던 물소리의 서늘함을 잊지 못한다. 그때, 나는 무엇을 보려 홀로 그 길을 떠났던가? 답답하던 일상을 두고 떠났던 어느 여름의 일기를 열어본다.
‘메타세콰이어 숲을 간다. 짐작한 원근의 숲속으로 찾아온 내가 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던 저들이 내게로 온다는 표현이 맞지 싶다. 숲이 오고, 자전거가 곡선을 그으면서 오고, 젊디젊은 사랑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희롱으로도 오고, 오랜만에 갖는 엄마의 푸근함이 그 뒤를 따라 일상을 털면서 오고, 아이의 웃음도 마침내 크게 숲으로 소리를 흩뿌리며 온다. 숲도, 길도, 혹은 사람이 만들어 낸 그 모두가 깔깔거리며 온다. 그 틈을 비집는 햇살도 곧이어 따라오며, 가벼워진 모두의 발걸음에 슬며시 속도를 준다. 모두가 그 속이다. 곧 하늘이며, 초록이고, 일직선이고 같은 공간이다. 그런 풍경에 담겨 이미 깃털처럼 가벼워진 나는 조용히 그 길을 간다.’
어렵게 시간을 내었던 그해 여름의 피서에서 나는 얻은 게 많았다. 사람의 생각이란 어떤 일에는 참으로 무모하여 정상에서 토해낼 일순의 탄성을 목표로 몇 시간에 걸쳐 산을 오르며, 순간의 짜릿함을 위하여 곧 도래할 숙취에도 들이켜는 찬 맥주 한 잔이며, 계곡에서 맛보는 한 조각의 미감(未感)을 위하여 수박 통을 들고 오르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이러한 무모함의 가치는 목표를 향한 능동에 있지 않을까? 더위에 관해서만 하여도 어디 몸의 체온을 몇도 내려보겠다는 단순한 목적뿐일까? 그래서, 풀벌레들도 숨어 버리는 혹서임에도 이열치열의 역설과 함께 힘겨운 피서 행렬은 여전히 긍정적이다. 하지만, 애처로움이 앞서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도시 생활이 팍팍했음의 증거에 이만한 것이 또 있을까? 거리를 다시 내려다본다. 도대체 무엇이 목적되었기에 뭇사람이 벌이는 인내의 실천은 이다지도 절실한가.
피서란 애초부터 수동으로 표현되지 말았어야 할 말이다. 새로이 정의될 수 있다면, 저마다 시원함을 찾아 나서는 능동적 패기의 뜻이었으면 한다. 말하자면, 가슴을 넓히고 세계를 받아들이려는 젊은 에너지의 또 다른 표출 같은 것 말이다. 젊은이들이여 시원함을 찾아 떠나라. 심원(深原)의 바다로, 사색의 숲으로, 혹은 인파의 약동 속으로. 그리고 바야흐로 움츠린 가슴을 풀어 그 시원함을 단 일분일초라도 고스란히 느끼고 돌아오라. 행렬이 고달프다면 맛은 오히려 달콤하고, 추억은 더욱 값지리라.
어찌 보면, 삶이란 떠나고 돌아오는 행위의 연속일지도 모를 일이다. 이 계절의 축복은 시원함을 찾아서 잠시 떠나 보려는 욕망의 설렘과 실천의 분주함에 있다. 따라서 나는 오늘 저 젊음의 무모한 행보들이 하나의 예외도 없이 어여삐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