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한 번도 나의 기를 죽인 적이 없다.’ 이윤기 선생의 유고 산문집에 있는 말이다. 나와 내 어머니와의 관계에도 저렇게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을까? 겨우 생각한 것이 ‘어머니는 나를 꾸짖은 적이 별로 없다.’ 정도이다. 단호하지도 적극적이지도 못한 어린 시절이었음을 고백한다. 자주 들었던 ‘속에 무엇이 들었을까?‘ 따위의 말은 칭찬이기보다는 사소한 일에도 얼굴이 유난히 붉어지곤 했던, 말수 적은 소년에 대한 위로였음을 안다.
나의 사춘기 또한 부끄러움으로 점철된 나날들이었지만, 그걸 숨기기 위하여 여전히 말수를 줄여가며 태연함을 가장하였을 뿐이다. 어느 시절, 내 청춘의 한 목표는 그런 부끄러움으로부터의 탈출에 있기도 했다. 우스운 것은 그랬던 내가 지금은 제법 뻔뻔한 축에 속한다는 것이다. 세파에 마음도 껍질도 두꺼워진 탓일까? 그리고 부끄러움이란 말이 성년의 나에게서 서서히 멀어진 것은 다행한 일이었을까?
부끄러움이란 단어를 다시 끄집어낸 것은 오랜만의 일이었다. 여자는 가방에서 무화과 몇 개를 꺼내어 내게 내밀었다. 익을 대로 익은 무화과는 속살을 부끄럼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뜬금없이 얼굴이 붉어진 건 왜일까? 그날, 우리의 대화는 어디까지나 그녀가 내민 무화과의 모양이나 맛이 주제여야 마땅했지만, 나는 그러한 무화과의 관능 같은 것을 제쳐놓고 오히려 그 과일의 태생적 슬픔에 대하여 생각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무화과에는 겉으로 꽃을 피우지 못하는 아픔이 있다. 속에다 작은 꽃을 무수히 간직하고 있으나 끝내 꽃으로 드러내지 못한 채 유실수가 되고 마는 꽃의 운명. 그러한 꽃의 속성이 마침내 내 감성의 파이프라인을 수십 년 전과 연결함으로써 풋내기 시절 부끄러움 때문에 차마 꽃으로 피우지 못했던 과거의 한 페이지를 열어보게 한 것이다. 무화과의 여자가 어쩌면 한때 내가 숨을 죽이고 뒤를 밟던 그 여학생일 수도 있겠다는 일방적인 상상에 잠긴 것이다.
나보다 한 살 아래로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던, 고등학교 시절 등굣길에서 자주 스치던. 그 집은 동네에서 제일 큰 집이었고 종종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입었던 하얀 춘추복의 옷깃이 마치 칸나의 이파리와 같이 끝이 뾰족하였지만, 나는 오히려 그 촉감이 한없이 부드러울 거라 여겼다. 매일 아침 시간을 그녀와 맞추는 것이 일 년 동안 정확하고 예민하게 반복되었다. 그러나 끝내 말을 걸지 못했을뿐더러, 한 번도 그녀의 걸음걸이를 앞지르지도 못하던 소심했던 나만의 동행이었다.
버스나 인파 속에서 모습을 놓쳤을 때 비로소 공부나 다른 생각에 몰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소년이 마음에 새긴 기다림이라는 비밀의 공간은 무척 은밀했으며 매일매일 밀도를 더해갔다. 마치 무화과 속의 은폐된 작은 꽃과 같이. 부끄러움은 때에 따라서 생의 활력이 되기도 한다. 짝사랑 같은 것이 그런 것으로 희망을 앞세웠으므로 늘 신선했다. 대체로 청춘의 아름다움은 그런 데에 있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의 청춘도 그런 막연한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그날, 중년의 여자를 눈앞에 둔 나는 한편으로 불안하였다. 꽃을 피우지 않은 무화과가 견디다 못 해 마침내 부끄럼을 무릅쓰고 과육을 드러내는 것이듯, 나의 얼굴 붉힘이 무화과의 터질듯한 모습에서 비롯된 중년의 치기로 오해되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 또한 부끄러운 일이다. 대체로 중년의 부끄러움은 그러한 관능 때문일 수가 많으므로 여자의 오해와 긴장은 당연했다. 그녀의 무화과는 끝내 꽃을 드러내지 않을 것임에도 나는 그러한 긴장을 오래도록 즐기고 있었던 것 같다. 맞다. 부끄러움은 긴장의 연속이기도 하다. 후~! 그 긴장 속에서 부끄러웠던 측은 여자였을까 나였을까?
나의 부끄러움은 도를 지나쳐 때론 바보스럽다. 무화과의 여자는 나보다 한 살 아래였지만, 오히려 “나이가 많은 여성이 친구로 지내자고 대쉬하면 대체 그 일을 어찌할꼬?”와 같은 상황의 설정을 가끔 해 보는 것이다. 말 트기와 같이 서로의 간격을 좁히는 일은 사교의 자연스러운 절차라서 상대가 남자일 경우와 마찬가지로 술 기분을 핑계 삼아 슬쩍 넘어가도 될 일이련만, 분명히 나의 첫 대답은 “아직은 안 됩니다.” 일 것이고, 계면쩍어하는 그 여성에게 “누나란 칭호를 오래 남겨두고 싶어요.” 따위의 너스레가 고작일 터이다.
어릴 때부터 학년이 한두 해 위인 누나들은 철옹성 안의 여왕같이 도도한 존재였다. 그 이후로 연상의 여성에게 말 걸기란 내 사교의 세계에는 도무지 존재하지 않을 방식이고, 누나들은 부끄러움의 대상에 있어서도 최상위. 하루 볕도 무섭다던 그 오뉴월을 몇 해 더 겪은 누나들을 마주하는 순간 벌써 나는 주눅이 들 것이고, 그녀들은 나이 많은 형들을 상대해 본 노련함으로 어린 나의 심연까지 꿰뚫으며 어쩔 줄 모르는 나의 바보스러움을 그때마다 동정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우습게도 그러한 기우의 상황이 얼마 전 어느 모임에서 있었다. 나는 어여쁜 누나들의 출현에 어지간히 긴장하고 있었으나, 그 감정을 들키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 그만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어김없이 사 십몇 년 전의 감정의 기복들이 되살아온 것은 물론이다. 말 트기를 제안한 그녀들의 장난기는 공교롭게도 어릴 적 동네 누나들의 표정에서 읽는 것들이었으며, 나는 그러한 감정을 들킨 것이 내게 불리한 일이 아니었을까 잠시 고민하였다. 그러나 그날 저녁 나의 기분은 의외로 유쾌했다. 대상을 부끄럽게 바라본 행복, 그 청춘의 특권을 오랜만에 만끽해 본 것이다.
청춘의 부끄러움은 내가 바라던 어떤 아름다움을 막연히 기다리게도 하였으나, 장년의 껍질 속에 오래 숨어 있었던 그 부끄러움이 몰래 나타나 어느새 나를 그 청춘의 시절로 옮겨놓지 않았는가. 그리고 마치 오랜 기다림 이후에 얻은 성과와도 같이 되살아온 나의 부끄러움에 대하여 비로소 긍정하기 시작하였다.
나의 부끄러움은 그리 점잖지 않다. 여자 앞에만 서면 상대의 나이는 물론이고 내가 어느 연령층에 속해있었든지 불문하고 불쑥불쑥 나타닌다. 나에게 있어서 여자를 마주한다는 것은 마치 봄볕이 한창인 날, 담장 너머에 널린 이웃 누나의 빨래를 훔쳐보는 기분과 같은 것이다. 나른함 이후의 건들바람처럼 산뜻한 것이기도 하나, 그 흔들림은 피의 흐름을 다그치는 선동의 깃발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부끄러움은 나의 소심한 관능에 가끔 불을 지핀다. 언젠가 동백섬 산책로에서 발견한 낙화한 동백꽃의 무리를 보며, 이웃 누나의 빨래를 생각한 건 왜였을까? 어느 여류의 글에서 낙화한 동백꽃은 처연함의 상징으로 씌기도 했다지만, 점잖지 못한 나의 상상이 이 꽃을 모독한 것이 될까? 그러나 나는 내 감정의 솔직함을 믿는다. 내가 본 것은 낙화의 처연함이 아니라 봄볕이 스민 색의 부드러움이었으니, 나의 상상은 끝없이 부드러움의 시절로 항해하는 것이다. 순간 나의 기분 또한 방금 붓에 묻힌 붉은 물감이 하얀 화선지로 막 번지듯 스멀스멀 관능적으로 물들어 가는 것이었다.
어떤 여자가 말했다. 낙화한 동백꽃으로 천에 물을 들이기도 한다고. 나는 염색된 천을 상상하였다. 곧바로 동백꽃과 이웃 누나의 빨래와 그것을 본 내 뺨의 홍조가 모두 같은 색임을 알았다. 그것은 꽃 본연의 선연함으로부터 엷어지는 붉음이며 빛이 막 꽃잎을 통과할 때의 투명함 같은 것이었다. 지나간 나의 부끄러움도 어디까지나 그 부드러움에 대한 갈구였다.
돌이켜보면. 마주 섰던 여자들의 나이가 바뀌어 갔듯이 내 부끄러움의 역사도 순수의 시대에서 출발하여 관능의 시절을 지나고 방관의 시기를 겪었다. 중년이 된 나는 가끔 시간을 돌이켜 그 순수를 사무치게 그리워하기도 한다.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여전히 부끄러움을 숨기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나의 부끄러움은 늘 그랬듯이 비밀이 되지 못한다.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얼굴이나 목소리를 통하여 불쑥불쑥 드러나기 때문이다. 다.
연상의 누나들이여! 그날, 내가 말을 터지 못한 연유가 유달리 붉은 볼을 지녔던 나의 소년 같은 기질 때문이라 과소평가하지 마시라. 아울러, 호의에 대한 나의 거절이 실례가 아니었기를 바란다. 당신들은 속에서 동백꽃처럼 붉어지고 있었던 나의 순수함을 눈치챘어야 하나, 혹 발견하지 못했다면, 내 감정의 퇴락보다는 세파에 두터워진 나의 껍질 탓이 더 크다고 여기시길.....
아! 가슴 두근거림은 청춘들만의 소유물일까? 다시 생각한다. 중년의 부끄러움이 어디 속살을 드러낸 무화과의 관능 앞에서만 생기랴. 모든 여자 앞에 서게 되면 내 속내는 언제든지 붉어질 준비를 한다. 부끄러움의 근원이 언제나 거기에 있었던 것이며, 순수이든 관능이든 이젠 그 모두를 아름답다고 말해야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