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앨범 목록에 ‘빛’이란 이름의 폴더가 있는 것은 말이 되질 않는다. 사진은 빛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 것으로, 모든 사진의 실체이며 주체가 곧 빛이니 따로 분류될 것이 아니란 말이다. 사진 이미지란 어느 한 시점 카메라의 조리개를 통과한 빛의 변주에 불과한 것이지 빛 자체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빛’이라고 써 놓긴 하였지만, 기실은 빛이 아니라 그림자의 그림이 전부인 셈이다. 빛의 포착은 원천적으로 무리다. 더욱이 그림자는 빛이 사물을 통과하지 못한 궤적이어서 오히려 빛과 대치된다고 할 수 있다. 노래 가사에서조차도 그런 반대의 의미였다. ‘~그대는 나의 행복 그대는 나의 불행, 사랑하는 내 마음은 빛과 그리고 그림자~’
하지만 내게서 빛은 희망이며 상징이고, 때로는 종교처럼 궁극적이기도 한 확고한 관념이어서 잡다한 것들과 따로 분리되어 한 분류가 되어야만 마음이 편하다. 또한, 빛과 그림자는 바늘과 실 같은 것이어서 그림자를 묶어 둠으로써 빛의 꼬리를 잡았다고 위안하는 것이 큰 무리는 아니지 싶다. 그런 위안으로 나는 여전히 '빛'이라는 폴더에 그림자의 사진을 계속 모으는 것이다.
빛과 그림자. 저들이 내게 주는 큰 즐거움의 하나가 소위 포착이란 짜릿함이다. 둘이 이미 한통속으로, 마치 나의 포착 능력을 테스트라도 하듯 은근슬쩍 내게로 온다. 순간 승리에 눈먼 내가 허둥댐은 물론이고, 찬찬히 살필 겨를 없이 셔터를 눌러댄다. 그런 후에 전리품들을 차곡차곡 폴더에 쌓아두고, 오늘같이 한가한 날 하나씩 꺼내 보기를 좋아한다는 걸 이미 저 둘은 안다. 그래서 날이 갈수록 빛과 그림자가 연출하는 테스트의 강도는 점점 세어져만 간다. 어떨 땐, 매우 짓궂기도 하여서 촬영 준비를 해놓고 몇 시간을 기다려도 오지 않다가도 방심한 어느 순간 난데없이 나타나기도 한다. 모처럼 의기양양한 내가 순간을 야무지게 포착하려고 획 돌아보는 순간, 저들은 멀찍이서 ‘흥~ 그 정도로?’ 하며 나를 비웃으며 도망가기 일쑤다. 내가 그 궁극이 없는 유희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매번 저들의 놀림감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유희 끝에 어찌어찌하여 내게 포획된 저들을 가끔 꺼내어 보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다. 사진은 주로 흑백일 경우가 많다. 그 흑백의 건조한 그림은 친절한 천연색과는 달리 분명 두뇌의 다른 한구석을 더 움직이며 더 적극적으로 나를 조련시키는 무엇이 있다. 상상. 그림자가 실체가 아니라 상(像)이어서 일까? 무릇, 상상의 과정은 양적으로 보아서도 나의 삶에 있어서 얼마 되지 않은 소중한 시간이지만, 그러한 집중의 순간은 어디까지나 부산한 세상에서 고립될 수 있는 자유이고 기쁨의 순간이다. 그리하여 매번 다양한 상상을 끌어내기도 하며 그때마다 달리 오는 어떤 확신에 놀라기도 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이런 그림자의 그림은 추상과 실체의 중간쯤 되는 영역으로 뻔하지 않고 골치아프지도 않는 적절한 수준이니, 내가 이 사진들을 유독 자주 펴 보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눈에 보이는 삼라만상이 서양화라면 그림자는 분명 수묵화다. 처음엔 단순히 색깔과 형체에서 오는 시각적 구분이라 생각했으나, 명료한 것보다는 다소 흐릿한 사진에 머무는 시간이 훨씬 길다는 사실로 설명이 될 수 있을까? 물론 수묵을 서양화보다는 더 높은 경지로 여기는 나 같은 사람들의 편견에 국한될 테지만 말이다. 가령 유리 항아리에 비친 물방울을 찍은 사진에서 언젠가 보았던 '신사임당'의 포도 그림을 상상한 것과 같은 것이 그러하다. 상상은 그리하여 신사임당의 그림을 실제로 찾으려는 호기심을 유발한다. 또한, 상상은 그 상태로 머물지 아니하고 앞의 확인과 생각을 거쳐 또 다른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문득 이 조잡한 잡문 한 페이지를 써보려 한 것도 흑백의 그림자가 주는 고마움이 아닌가.
그러나 여전히 빛에 대한 의문은 남는다. 내가 그림자의 그림을 통하여 빛의 짧은 꼬리를 추적했다 하여 어찌 포착이란 말을 감히 쓸 수 있겠는가. 애당초 빛의 시발은 수 천 년의 거리 저편에 있었으나 굳이 과학을 동원하여 따지지 않으련다. 설령 그랬다 하더라도 영원성이라는 무너뜨릴 수 없는 관념은 나 따위가 감히 포획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의 작은 포획이란 얼마나 허황한 행위인가. 그러므로 내게 빛의 아름다움이란 허상을 찍어 남기는 실체이기보다는 빛이 흐르는 과정을 지켜보는 행위에 있음을 깨닫는 과정이어야 한다. 그렇고 보면, 카메라를 들이댄다는 것도 결국은 허상의 한순간을 아름답게 침착시켜 보려는 애처로운 노력이며, 그 또한 모두 사라질 것이라 보면 빛이란 도리어 어느 순간에도 미련을 가지지 말아야 할 참 어렵고도 위대한 것이다.
인간의 두뇌 작용이란 것도 현상의 포획과 같은 과학적이고 명료한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침착된 것들에 대한 회상과 조합의 과정이거늘 덜 분명해도 되는 것은 아닐까. 삶이란 것도 다를 바가 없어서 무얼 붙잡아야 한다는 심각하고 복잡한 일이기도 하지만,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그냥 흘려버려도 될 자유로운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법정에 섰을 때가 있었다. (삶이란 때론 조잡한 것이기도 하여, 가끔 그런 일에 목을 맬 때가 있다.) 나의 대리인이 말했다. "두려워 마십시오. 모든 것이 사필귀정입니다." 그때 그 말이 믿기지 않았으나 번민과 갈등의 하룻밤을 보내고 다시 빛을 맞았을 때 비로소 수긍하였다. 조잡한 삶의 조각은 찰나의 그림자일 뿐이고 세상의 빛은 여전하였다. 옳고 그름은 내 몫이지 판사의 몫이 아니었음을 그때 알았다.
카메라를 들고 창가에 선다. 나는 여전히 아름다운 포획에 미련이 많으나, 텅 빈 마루에는 내가 보는 만큼의 여과된 빛이 내려앉을 뿐이다. 다시 ‘빛’의 폴더를 열어 틀 속에 가둔 그림자의 사진을 본다. 빛의 근원을 밝히려 한 나의 애처로운 몸부림. 아서라! 빛의 실체 밝힌다는 일은 그릇된 시도는 아니었으나, 빛이 오던 길로 수 천 년이 걸릴 일이기도 했다. 네가 밝혀야 할 것은 빛이 아니라 너의 틀이니라. 마음을 가다듬는다는 것은 스스로 틀을 만들고 그 속에 무얼 집어넣는 일련의 과정이다. 빛은 좀체 틀 속에 온전히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 빛이 내게 묻는다. 오늘 너의 사유는 내 꼬리를 조금 붙잡는 데 도움이 되었더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