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름이 가장 깊은 곳까지 다다른 것 같다. 날씨가 변덕을 부리고 사람의 주변이 이러저러하더라도. 우주의 질서는 인간이 섣불리 판단하는 것보다 더 정교하고 정확하다. 아내가 창에 매미가 붙었다고 사진을 찍어 카톡으로 보낸다. 나는 비몽사몽 그것을 수첩에 그려 놓았다.
그것이 고공의 내 집 가까이 날아오른 이유를 나와 아내는 알지 못한다. 다만 저의 울음으로 아내가 잠을 깨었고, 순간 옆방의 나를 생각한 것. 나도 잠시 아내를 생각하였다. 그리고 수첩의 그림을 다시 아내에게 보낸다. 그리하여 이 포착의 순간이 아내와 나의 시간으로 존재하였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물리적 실체인가? 아니면 서로의 마음에 있는가? 그리고 그 모두는 우주의 질서 속인가? 모년 모월 모일, 허공에 매달린 매미가 문득 아내의 시간을 붙잡았고, 나는 盛夏의 백일몽을 꾼다.
2.
지난가을의 일기장엔 이렇게 기록하였다. 가을이 깊다. 사람들을 따라 나온 강아지는 물론이려니와 스스로 움직이는 고양이마저 다만 봄과 같이 나른하지 않을 뿐 햇살이 마냥 좋은 것이다. 햇살 아래에서 사람도 동물도 어느새 서로 거리가 없어졌다. 한해를 지나면서 이웃처럼 익숙해진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겨우내 긴 이별이 아쉬워 조금이라도 서로에게 더 살가워지려는 것일까? 고양이 곁에 내가 앉았다.
그러한 가을에 느낀 시간은 이랬던 것. 계절이 점점 흘러감에, 옷을 벗고도 후회가 없는 나무가 더 당당해진 것을 비롯하여 걸어 다니는 것들의 눈빛 또한 더 영롱해졌다. 오히려 초연한 것이 있다면 빛의 직진이며 창천의 높이이려니. 실은 오늘 작심하고 그것의 초연과 불변을 닮으려 이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어쩌다 그만. 작심한 마음은 흔들리고 모든 사라져 가는 것들의 의연한 아름다움에 더 매혹되고 있다. 건조한 땅 위로 바람이 불고 나뭇잎이 하나둘 떨어지는데, 시간을 잊은 나는 무심코 그 수를 헤아리고 있다. 시간, 그것은 구르는 낙엽처럼 흐르는 것임이 분명하다.
3.
그리고 3개월 후엔 또 이렇게 쓸 것이 분명하다. 가을이 가니 겨울이 온다. 옷을 두터이 입고 모자를 눌러 써야 하는 겨울이 오면. 나의 시야는 하늘, 바다, 산으로부터 급격히 하강 혹은 귀환하여 거리의 어느 모퉁이에 머무른다. 차가워진 기온에 몸이 둔해져서라기보다는, 사람들이 정해 놓은 시간의 단위를 함께 의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해의 남은 날짜를 세는 사람들의 마음이 조급해지고,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거리의 장식이 늘어나고 밤의 불빛은 더욱 화려해졌다. 계절을 어쩌겠는가. 나 또한 두꺼운 외투와 과장된 불빛에 둘러싸이고, 당분간 좁은 시야로 거리의 그림에 몰두할 것만 같다. 시간, 그것은 잠시 정지하기도 하는가.
4.
또한, 순간은 갑자기 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먼지처럼 잠시 떠돌다 서서히 잊히어 갈 것이다. 아~ 내가 믿었던, 산다는 것 또한 놀랍고 새로운 것이 아니라 그저 그런 흐름 속에 있었던 것. 오래전 어느 봄날, 죽은 사람 곁에 누워 본 적이 있었다.
그날 나는 일몰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창녕 고분에 누워서. 그날이 좋았던 것은 실로 오랜만에 시간을 의식하지 않고 시간을 기다린 것. 그리하여 마치 옛사람의 무덤에 기대어 그 사람의 시절을 상상하는 것처럼, 잠겨 있던 오래된 것 하나를 심연에서 건져 올리고 미소 지어 본 것.
아~ 기다림이란 두근거리는 것. 순식간에 왔다가 일시에 사라져 버리더라도. 그러므로 더 오래 남을 것. 일몰은 의외로 갑자기 왔으며 나는 일순 어둠에 덥혔다. 어둠 속에 있다고 하여, 그 시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리라. 시간은 마치 오래전에 죽은 사람의 것이기도 하다.
5.
오랜 시간의 경험으로, 빛의 영역은 확실히 조물주의 것이었다. 건축이나 카메라가 도저히 상상하지 못하던 결과가 종종 눈 앞에 펼쳐지기도 하고, 그때마다 어떤 불가항력을 느낀다. 건축은 그저 겸손과 수긍이어야 함을 알게 하는 것일까?
이를테면, 저 평면적 디테일에서 일순 공룡의 등짝 같은 그림이 펼쳐지다 사라졌음은 과연 건축가의 영역인가? 내 스탠드의 불빛과 같은 허세와 작위는 이미 계산된 것이나, 반면 벽에 새겨진 일시적 흔적은 건축가의 의도 여부를 충분히 의심케 한다. 그리하여 나 따위가 조절하는 빛이란 저처럼 유한하나, 조물주의 빛은 이처럼 예측 불능이다. 도저히 이기지 못하겠다.
빛은 시간의 궤적인가? 아니면 시간이 빛을 유도하는가? 내가 빛의 오묘함을 이기지 못하듯, 시간은 내게 좀체 넘볼 수 없는 불가해의 영역이다. 주제넘었다. 그것에 대하여 글로 쓰려 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