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요에서 촉발된 감각의 더듬이는 주위가 아직 어둡고 서늘한 것이라 살핀다. 이부자리 속에 홀로 누워, 시간 속으로 침잠하며 잠시 외로움을 느끼기에 공간의 촉감과 밀도는 그리 부족하지 않다. 공간이란 휘둘러봄으로써 짐작하는 것이며, 눈에 보이는 게 모두라고 말하곤 하였다. 그러한 나의 공간 속으로 소리와 빛이 야생 고양이처럼 스며든다. ‘~~파니스안젤리쿠스~~’ 아내가 이미 틀어놓은 FM 수신기에서 파바로티의 음성이 투명하게 흐른다. 어둠 속이던 공간은 빛에 앞서 음악으로 채워져 간다. 음악은 서서히 공간을 지배해 가면서 더는 외로움 따위의 사념이 비집고 들어갈 틈을 주지 않는다.
몇 분이 흘렀을까? 아내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파니스안젤리쿠스, 듣고 있었어?” 아내는 나에게로 스며들듯 지금 막 공간이동을 한 것이다. 그래! 아내도 파바로티를 듣고 있었구나. 아이를 태워주고 오는 차 안의 모습을 떠올리며 서로에게 거리가 있었음을 확인했을 뿐, 아내가 나누려는 공감의 말에 이미 짐작이 갔다. ‘함께’의 의미가 같은 시계(時界)에 있다는 것과 다른 것임을 몇 분 전에 동시에 듣고 있었던 세자르 프랑크의 음악이 증명하는 순간이다. 조금 전, 내가 아내의 공간을 그리면서 외로움을 잠시 멈추었듯, 차 안에서 같은 주파수를 맞춘 아내의 마음도 그런 것이었을까? 아내가 가쁜 숨결을 감추며 이불 속으로 파고든다. 일어나서 어젯밤부터 시작한 외로움이라 적어 두려던 일기장을 접었다.
책에서 말한 공간이란 물리적으로 같은 시계와 심지어는 시간마저 같아야 함을 전제하였다. 이불 속에서 내내 생각한 건, 공(空)과 간(間) 두 글자였다. 비우고 채우고. 그 속에 내가 있고, 없고. 그걸 바라보든지, 싫으면 벗어나든지. 공간에 대한 몰두도 어디까지나 보이는 그만큼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처럼 어떤 보이지 않는 것으로 함께 둘러싸인, 그리고 그 속으로 흐르는 동일체의 전율 같은 것이 존재한다고 느낀다면 공간은 어떻게 정의되어야 할까? 곁에 누운 아내의 따스함은 파니스안젤리쿠스를 동시에 들었던 차 안의 공간에서부터 이미 시작된 것이었다. 아내를 향한 나의 뜨거움이 그렇듯이.
아직은 모호한 관찰이다. 차원을 달리한 우주적 관점이 되면 혼돈은 명확해질까? 공간이입을 소재로 다룬 SF영화 아바타의 설정이 그랬다. 두 공간 사이를 넘나드는 데에 거리는 물론 시간의 부재 또한 어색하지 않았다. 이전의 영화에서처럼 장면의 단절로 시간의 경계를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히 이해되었다. 공간의 이동이란 그저 자연스레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할까? 공간 사이를 감각이 춤추고 다녔는지, 마비된 감각 사이를 공간이 자유롭게 스며들고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영화 속의 배우도 보는 나도 자유로웠다. 아무튼, 현대 과학의 힘이 미치지 않았다 하여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충분히 긍정하였고, 영화는 흥미로웠다.
감각에는 물질적이지도 정신적이지도 아니한 중간의 영역이 있는 것일까? 그 영역에는 무엇이 실재할까? 다시 생각한다. 그리움에 대한 느낌이 꼭 그런 것이 아닐까 한다. 감각으로 시작하였으면서도 막상 형체가 없으며, 문득 나타나기도 하고 불현듯 잊히기도 한다. 아~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어찌 '있지 아니하다.'라고 말하겠는가. 그리하여 오늘같이 정신이 맑아지는 날이면, 이미 여러 해 동안 감각을 나누어 가진 아내와 나는 잠시의 공간 격리 속에서도 영화 속 나비부족과 아바타가 나누던 그런 놀라운 교감을 경험하려 애쓰는 것이다. 기실은 아내가 이불을 빠져나간 새벽부터 짐짓 아내의 감촉을 그리워했다.
감각은 그러한 공간 속에서 더 숭고하게 진화하기까지 한다. 그리움은 서로 애절하게 나누었던 멀어진 감각의 환원 욕구에서 온다. 시각으로부터 시작하여 청각, 촉각 혹은 후각의 단계를 거쳤던 과거의 감각들이 물리적 접촉 없이도 오롯이 되살아오며, 마주 서지 않아도 충분히 같이 있음을 느낀다면 진화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그리하여 시간의 단절을 경험한 수년 전부터, 세상에 없는 어머니를 기억하는 내가 매일 그러했듯이 점점 더 진화하는 그리움을 준비하게 되는 것이다.
불현듯 이지만, 그때마다 오히려 새록새록 떠오른다는 것이 그걸 증명한다. 지난밤이었고, 꿈인 줄 알았다. 당신께서 내 눈에서 멀어진 지 꽤 오래건만, 태어나던 순간부터 나에게 잉태시켜 주었던 그리움이란 것이 내 모든 감각을 일제히 깨우고 있었다. 그 학습된 감각으로 내가 마침내 떠올렸던 어머니의 젖 냄새를 비롯하여 투박하던 손바닥의 꺼칠한 감촉, 혹은 미온의 떨림으로 전달되던 마지막 병석의 체온까지도 고스란히 이불 속으로 들어와 있었다. 다만, 사위가 분간이 가지 않았으므로 몽유 속이라 여겼으며, 상대적이지 못하였으므로 간편하게 외로움이라는 죽은 이름으로 미완의 일기를 썼다. 이제 살아 있는 단어로 고쳐 쓸 차례다. 그리움.
여전히 같은 이불 속이다. 지금 막 아내와 나는 좀 더 세밀한 깊이로 또 다른 감각을 시간의 켜 위로 퇴적시키고 있다. 더 완전한 그리움으로 진화되기를 바라면서. 확고해진 것이 있었다면, 나는 여전히 시간이 다른 두 여자와 같은 공간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언젠가 내가 다른 이의 시계에서 사라지고 난 후에 혹 그들이 감각의 진화를 꿈꾼 나의 흔적을 발견한다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말이 누군가의 그리움으로 되살아나길 바란다.
진화란 살아 있을 때만 붙일 수 있는 말이다. 그렇다면, 공간도 그리움도 다 살아 있는 것이다. 시간의 부재가 무슨 문제가 되랴. 파니스안젤리쿠스, 작곡가 세자르 프랑크는 미사의 곡으로 이 노래를 쓰고 ‘생명의 양식’이라 이름 붙였다. 종교적 의미를 넣지 않더라도 참 아름다운 명명이었으며, 백오십여 년의 세월을 넘어 그 생명의 찬양에 나는 감동하고 있다. 잠시 해본 나의 사유도 참된 양식 같은 것이길 바란다. 말하련다. 공간 그리고 그리움, 이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포함하여 삶이란 실로 아름답다고 할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