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딩굴딩굴공작소 Nov 03. 2022

[작심(作心)3일] 8편. '결'

매월 3일, 마음에 담아 마음을 담는 DDF 프로젝트 작심(作心)3일

몽블랑을 좋아합니다

권창숙



내년 3월, 싱가포르 여행을 준비 중이다. 어제 싱가포르 여행을 함께할 사람들과 밥을 먹다가 여행 중 자유시간이 주어지면 무엇을 할 거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난 현지의 맛있는 베이커리 카페를 찾아가 맛있는 빵을 먹을 거라고 이야기를 했다. 늘 여행을 가면 그곳에서 빵이나 현지의 커피를 마셨다.


나도 처음부터 빵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직장생활을 하던 1990년대에만 해도 대형 프랜차이즈의 빵집이 나오긴 했지만 빵은 식사 대용으로 어쩔 수 없이 선택을 하던 음식이었다. 즉, 빵이 맛이어서, 먹고 싶어서 구매를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던 내가 빵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된 건 일본에서 거주하기 시작하면서였다.


프랑스빵, 독일빵과 다르게 일본의 빵은 단맛을 가미하고 모양에 신경을 쓴다. 독일의 건조하고 딱딱하고 곡물 본연의 맛을 중요시하는 빵은 건강하긴 하지만 아기자기한 느낌은 덜하다. 프랑스빵은 크로와상과 같은 페스츄리류도 많지만 그렇게 달지는 않다. 그러나 일본의 빵은 단팥빵처럼 단맛도 있으면서 아기자기한 모양에 신경을 써서 빵의 가치를 높이고자 한다. ‘장인’이라는 뜻을 가지는 일본의 ‘타쿠미’라는 말에서 느껴지듯이 일본의 빵들은 하나하나의 작품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나는 빵에 푹 빠졌다. 그러면서 베이커리를 배우기도 했다.


가장 좋아하는 빵 중에 페스츄리류가 있다. 많은 양의 버터를 쓰고, 생지를 겹겹이 쌓아 공기를 넣어 빵의 결을 살리고 그래서 빵의 부드러움과 버터의 풍미를 느끼게 하는 페스츄리류. 버터가 듬뿍 들어가고 만드는 과정에서 버터가 녹지 않도록 차가운 기온을 유지시켜야 하면서도 겹겹이 쌓는 수고로움까지 함께 들어가야 하는 빵. 크로와상. 몽블랑 등의 빵은 그래서 손으로 결을 따라 뜯어먹어야 하는 빵이다. 수고로울 수도 번거로울 수도 있지만 그 결을 따라 뜯어먹을 때 그 빵의 진짜 맛이 느껴진다. 버터의 풍미가 입안에 퍼진다. 결의 부드러움도 느껴진다. 딱딱한 페스츄리의 겉과 달리 그리도 부드러운 속이라니. 버터가 많이 들어가 노란 속을 가진 빵 (칼로리가 엄청난 탓에 많이 먹기보다 적은 양이라도 버터가 듬뿍 들어간 맛있는 페스츄리를 먹는 것을 추천한다).


딩굴딩굴 공작소의 ‘사고뭉치 프레임’에 이런 글이 있다.

 ‘생각의 격을 높이고, 생각을 곁에 두고, 생각의 결을 나누다’

‘결을 나누다’의 전제는 모두의 결이 같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서로의 결을 바라보고 서로가 그 결을 존중해주면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만나게 되는 사람들을 조금 더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 나름의 ‘겉바속촉’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결대로 산다는 건...

전하영


어릴 적 시골집에서 나무땔감을 도끼로 자른 적이 있다. 다소 무거운 도끼로 한 번에 나무를 쪼개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있는 힘껏 내리치다 보면 도끼가 나무에 꽂혀 빠지지 않아 애먹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럴 때마다 형들은 결대로 내려쳐야 한다며 시범을 보이곤 했다. 그다지 힘을 들이지 않은 것 같은데도 나무가 쩍! 하며 쪼개지는 모습이 신기했다. 결을 따라가면 어렵게 느껴지는 것도 쉽게 해낼 수 있는 것인가?


나무에는 결이 있다. 자라온 시간만큼 쌓인 나이테가 결을 만들어냈기에 결은 오롯이 삶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결이 고운 나무는 고운 삶을 산 것일까? 아이러니하게도 그 결을 따라 도끼질을 하면 쉽게 자신의 몸을 내어주며 두 동강이가 된다. 어쩌면 켜켜이 쌓인 삶의 무게를 내려놓고 땔감이라는 또 하나의 숙명을 순수히 받아들인 것은 아닐까?


결대로 산다는 것은 자신의 가치를 잃지 않고 잘 산다는 의미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지 않을 듯하다. 삶의 질곡이 없는 삶이 어디 있겠냐만은 자신이 선택하고 흔들리더라도 그 길에서 비켜서지 않고 묵묵히 걸어온 삶이라면 나름 결대로 살아온 삶이 아닐까?


대안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대학시절 평생교육을 만나면서 내 삶의 진로를 결정하고 지금까지 한 번도 벗어나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 때로는 미지의 길이기도 했고 가끔은 고속도로처럼 신나게 달리기도 했고 자갈길을 힘겹게 걷기도 했지만, 한결같이 평생교육을 손에 놓지 않은 나의 삶이 나름 괜찮은 삶이라 생각한다.


고운 나이테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답게, 나의 결대로 살아온 삶에 함께 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결이 같다’는 것의 의미도 배우고 때로는 결을 맞추기도 한 지금의 삶에 충실할 수 있어 좋다. 앞으로도 내 삶의 결대로 살아가고 싶다.




결, 변하는 삶

한성근


결이란 말을 들었을 때 눈에 보이는 것이구나 했다. 삶의 질곡이 눈에 보인다? 결은 그런 것 같다. 나는 사람들에게 어떤 결로 보일까? 한결같다는 말은 변한다는 것과 다름일까? 변한다는 것의 방향성이 결인가? 삶을 성찰하고 그 결과로 변하고 결이 생기고, 결은 통합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 봐 그래 나도 변했으니까’ 변한다는 단어를 떠올리자 머리에 맴도는 노랫말이 있다. 그래 모두 변하는 거야! 나도 변했잖아! 이렇게 변하는 과정이 결이 되겠지? ‘세월이 날 철들게 해, 시간이 날 물들게 해 안돼 안돼~’ 꿈결 같은 세상이라는 노래다. 어른이 된다는 것, 세상에 적응한다는 것이 변해가는 과정이 되어 왔다.


그 변화 속에서 나라는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위해 숙고한 흔적이 결이 되어 사람들에게 보일 것이다.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단단해진 결, 일을 이루기 위해 부드러워진 결, 자주 사용해서 익숙해진 결, 아직도 사용하지 못해 어리숙한 결 등 산 날보다 살날이 적어지는 요즘 삶에 대한 결이 조금은 부드러워지기를 바라고 있다.


“느낀 그대로를 말하고 생각한 그 길로만 움직이며, 그 누가 뭐라 해도 돌아보지 않으며, 내가 가고픈 그곳으로만 가려했지, 그리 길지 않은 나의 인생을 혼자 남겨진 거라 생각하며, 누군가 손 내밀며 함께 가자 하여도 내가 가고픈 그곳으로만 고집했지, 그러나 너를 알게 된 후 사랑하게 된 후부터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변해가네, 우 너무 쉽게 변해가네, 우 너무 쉽게 변해가네”


좋아하는 가수의 ‘변해가네’라는 노래를 들으며 글을 마감한다. 삶을 사랑하며 나는 변할 것이다. 그 사랑이 날 변하게 할 것이다. 나의 고집과 아집이 무너지고 새로운 삶의 방식이 방향이 생겨날 것이다. 결의 탄생! 그래서 삶은 늘 기대된다. 과연 어떤 모습이 되어있을까? 내 삶의 끝에서 만날 나의 삶의 결이 기대된다.




결의 품격

최정연


‘거칠어진 머릿결,

이젠 빗어봐도 말을 듣질 않고..‘


고 유재하 가수의 「그대 내 품에」라는 곡의 가사인데, 노래 속 주인공처럼 가슴 아픈 사연이 딱히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이를 먹어갈수록 고운 머릿결이 거칠어져 가는 것을 부정할 수 없어서일까. 싸늘한 찬 바람이 불 즈음이면 나도 모르게 가끔 흥얼거리며 손으로 머릿결을 만지작거려 보게 된다.


사람들은 대부분 눈에 보이는 것들로 판단을 하지만, 결에는 눈으로 보고 짐작하는 것과 직접 접촉하여 느끼는 차이가 분명히 존재한다. 마치 명사를 가장하는 형용사나 동사 같은 느낌이랄까. 게다가, 또 하나 재미난 사실은 결에는 항상 방향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물결도 흐르는 방향이 있고, 식빵의 속살도 결의 방향이 있다. 간혹 결의 방향과 반대로 억지로 힘을 가하면 원래의 고유한 방향과 맛을 잃는다. 또, 거친 표면은 거친 대로 두어야지 억지로 깎아내리면 겉으로는 그럴싸해 보여도 결국은 표면에 상처를 입는다. 그러니, 무언가의 결을 살필 때는 반드시 만져보고 느껴보아야 한다. 눈에 보이는 결을 알아채기도 하고, 때로는 손끝에 전해지는 감촉을 통해 결의 맥락을 느껴야 서로의 좋은 관계를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다.


흐르는 물결을 거스르면 강이 죽고, 폭신했던 식빵도 결 반대로 찢으면 질겨진다. 거친 나뭇결을 사포로 문질러 부드럽게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본래의 결은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결을 알아채기 위해 나는 오늘도 손을 뻗어 느껴본다. 손끝에 전해지는 감촉을 통해 바람의 결을 느끼고, 사람의 마음을 알아채 간다. 누군가의 결이 궁금할 때, 보는 것으로만 짐작하지 않고 굳이 부대껴 보는 것은 아마도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결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기 위한 고품격의 소통일지도 모를 일이다. 나의 머릿결도 만져봐야 아는 것처럼.




딩굴딩굴공작소(DDF; Dinggul Dinggul Factory)는 배움을 통해 자신의 삶을 새롭게 디자인하는 평생학습공동체 '삶과앎 모두의 평생학습'의 공유공간이자. 일상을 작당하는 실천공동체입니다.



이전 08화 [작심(作心)3일] 7편. '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