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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이의 감촉 Sep 18. 2023

열한 알

오늘밤 나의 사랑과 무사히

약의 개수를 센다. 5년 전부터 잠들기 전 복용하는 약이다. 부러 수를 세지 않았다. 내 불행을 세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열한 알. 그저 해맑고 싶은 내게 고약한 인상을 쓰는 숫자. 이참에 들여다본 약이 귀엽다. 반달로 쪼개진 새파란 약. 레몬색도, 연한 연둣빛도 있다. 숫자 대신 알록달록함을 벌컥 삼킨다.

순간 한 녀석이 어금니에 걸린다. 황급히 들이키는 물. 야속하게도 쓴맛은 남기고 제 몸만 쏙 빠졌다. 얼굴을 찌푸리고 혀를 내밀며 쓴맛을 희석하는 동안

생각들이 덮친다. ‘내가 왜 약을 먹게 되었는가?’ 잠 없는 아기 덕에 잠자는 것과 먹는 것, 즉 변연계에 생겨버린 문제는 시작이다. 돌봄 문제, 노키즈존, 양육자에 대한 시선, 아동 혐오, 자가면역질환 등이 출렁이며 다가온다. 가만히 있는다면 피해의식이 온몸을 다 적실 것이다. 나는 정수기 앞에서 재빨리 몸을 돌린다. 걸음을 재촉해 다다른 침실.


나의 천사들이 있다. 고이 잠든 두 아이. 아기 땐 발가락들이 꼭 옥수수알만 했다. 이젠 엄마와 같은 크기 운동화를 신는 아들. 여전히 아가인 양 보드라운 발바닥. 옴짝옴작 다리를 주물러주고 싶지만 깨진 않을까. 손바닥으로 스르륵 문지르곤 “내 새끼 어이구 내 새끼” 하며 머리카락을 넘긴다. 이번엔 둘째. 사랑스러움이 맺힌 두 볼의 살결. 놀라운 감촉을 감히, 손바닥에 담는다. 소스라치는 행복감이란 이런 것이구나. 얼굴의 잔털들이 일어난다.

나를 쫓아 찰랑거리던 녀석. 어느새 다가와 열린 문틈으로 기웃거린다. 저리 가라고 훠이훠이 하고 온몸을 뻗어 야무지게 닫는 문. 오늘 밤 나는 나의 사랑들과 무사히 잠들 것이다.


“육아는 성스럽고 멋진 일 혹은 배꼽 빠지게 재미있는 일일 수도 있다. 그보다 대부분은 감각이라는 명상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아이를 안고 어르고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반복적이고 더디고 지루한 일상이다. 우아하게 보이려 할수록 처참해질 수 있다. 무릎을 꿇고 스스로 비참해지는 과정에 두려워 떠는 것. 아이를 키우며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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