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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이의 감촉 Oct 20. 2023

부디 바람처럼

부모평전



그는 어깨에 큰 딸을 목말 태웠다. 얼큰히 취한 얼굴은 넘는 해와 비슷하다. 노을에 비끼는 산을 보며 이야기한다. "수진아, 저 산 같은 사람이 되어라." 딸은 아빠 말의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흔들리는 양 갈래머리로 아빠 어깨 위에서 신이 났다. 딸의 정강이를 꼭 붙들고, 흘러가는 공기처럼 읊조리던 그의 바람. 산 같이 크는 딸을 바라는… 진심은 그가 스스로 산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였을까?


나의 아버지의 함자, 클 태. '泰'는 아버지의 아버지, 내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지어주신 이름이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 태는 이름을 지어주신 아버지 앞에서 큰 사람이 되지 못했다. 쪼그라드는 존재였다. 태의 아버지는 당시 대부분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가물에 콩 나듯 집에 얼굴을 비쳤다. 그러면서도 아버지는 장자라는 이유로 태에 모질게 대했고, 심하게 때렸다. 태에 아버지는 공포 그 자체가 되어, 키가 아버지보다 컸어도 무릎을 꿇은 채 오줌을 지렸다.


태는 중학교 입학시험을 제법 잘 치러, 멀리 있는 명문 중학교에 진학하였다. 잔치를 열고 동네 자랑을 하며 아버지는 태에 대한 기대를 펼친다. 그러나 이는 솔밭에서 고기 낚는 격이었다.



중학생이 된 태. 매일 밤 치통으로 잠을 자지 못한다. 겨우 뜬 눈에 채비하고 나서면, 저 멀리 기차가 보인다. 태는 달리기 시작한다. 몇 리를 쉬지 않고 뛴다. 얼추 속도를 맞춰 후들거리는 다리로 기차에 오른다. 태의 손에는 도시락도 들려있지 않다. 오늘 점심도 운동장 수도꼭지 맹물로 배를 채운다.


어느 비 오는 날은 사람들이 많이 빠져 죽었다던 저수지를 지나다가 헛것을 보기도 했다. 분명히 우산을 쓴 여자가 인사도 없이 스쳐 지나갔는데 뒤돌아보니 사라졌다. 아버지는 태의 치통을 없앤다며 그를 무당에게 양자로 드렸다. 하루하루가 고통이었던 태는 그저 멍했다.


태가 유일하게 마음 붙인 것은 자전거였다. 키 작은 꼬마라 페달에 채 발이 닿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면 자전거를 타고 읍내를 누비고 또 누비었다. 나보다 큰 자전거 위에서 내 마음대로인 날. 바람도 공기도 다 내 것인 것만 같은 파란 때.


고통스러운 중학 시절을 지나 평범한 농고에 진학한 태. 하루빨리 집을 떠나고 싶어 일찍 해군에 입대한다. 입대 이후에야 비로소 밥도 제때 먹고, 키도 컸다. 이젠 세라복을 입은 멋진 청년이 되어, 키도 큰 예쁜 서울 아가씨와 결혼한다. 그리고 낳은 첫째 딸. 태는 아버지처럼 방황한다. 그러다 집에 돌아오면 손주를 등에 업고 이불 채비를 하는 며느리에게, 바늘에 실을 꿰어주는 아버지가 보인다. 손주에겐 깊고, 물처럼 찰랑거려, 아버지는 바다다. 그래도 여전히 태의 눈에 어른거리는 순간. 아버지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오줌을 지렸던 때. 고갯짓해도 그 장면이 떠나지 않는다.



칠순을 넘어 팔순을 바라보는 지금. 아버지가 마음에 살고 있어 태는 아직도 무겁고 무섭다. 그의 삶에 길게 드리운 아버지의 그늘. 딸을 꼭 닮은 손녀를 보며 아버지를 생각한다. 노년에 손녀를 안고 바다가 된 아버지는 태에 이제 말씀해 주지 않을까.

"태야, 크지 않아도 된다. 산 같지 않아도 좋다. 아니 산보다 산을 간지럽히는 바람처럼.

네가 자전거를 타는 장난꾸러기인걸. 그걸 타고 그렇게 좋아하던 걸 보면서 나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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