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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래터 Jun 15. 2023

버텨낸 날들의 숫자가 실은 성장한 날들의 숫자였다

나는 왜 프로덕트 매니저로 일 하는지 생각해 보며

이직 초기, 그러니까 아직 스타트업 시장에 유동성의 버블이 끝나기 직전, 어느 유명 커리어 서비스의 리크루팅 매니저와 티타임을 하며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플래터님은 왜 프로덕트 매니저로 일하고 계세요?"


왜일까. 왜 하필 프로덕트 매니저고 왜 하필 지금의 조직이었을까. 고민하다 꺼낸 나의 답은 이랬다. "저는 배움이 있어야 동기부여가 되는데, PM은 늘 새로우니 늘 배울 거리 투성이잖아요. 그래서 이 일을 하고 있어요."


IT 조직의 PM으로서는 부끄럽게도 나는 획기적인 아이템이나 트렌드, 혹은 재미난 서비스나 멋들어진 UX에 실은 별 관심이 없다. 나는 여전히 종이 책을 읽고, 문학을 좋아하고, 10년 전 게임 하나 켜지지 않는 싸구려 노트북을 쓰고, 여러 새로운 앱이 아닌 기본 메모장에 생각을 정리한다. 아날로그와 단순함을 지향한다. 보통 생각하는 IT 서비스의 기획자나 PM의 모습과는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덕트 매니저, 특히 지금 있는 회사의 프로덕트 매니저로 일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제품의 시작부터 끝, 기획부터 제작, 출시부터 성장까지 나날이 배움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스타트업'이라는 핑계로 땅바닥 짚고 헤엄친 후 "고생도 다 경험이지"라며 애써 자위하는 그런 배움이 아니라, 정말로 배워야 할 것을 배우고 또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모든 걸 누가 일일이 곱씹어 알려주는 일은 드물다. 대부분의 배움은 스스로 돌이켜보는데서 온다. 이 일은 왜 이렇게 접근해야 하는 걸까, 왜 이렇게 해석하는 게 맞는 걸까, 뛰어난 저 사람은 왜 이런 흐름으로 사고하는 걸까. 무엇을 제대로 했고, 또 무엇을 놓쳤던가. 그 짓을 몇 주, 몇 달이고 이어가며 수정하고 또 반복하고 나서야, 내가 맞닥뜨린 수많은 현상 너머의 맥락과 본질이 어렴풋이 보인다. 그리고는 깨닫는다. "아, 기획이란 게 이런 거구나. 그로스라는 게 이런 거구나. 내 직무, 이 업무의 본질과 맥락이 이거로구나. 이렇게 했어야 했구나."


이직 초기에는 모든 게 낯설고 어려웠다. 회고를 통한 배움은 한참 뒤에나 찾아오는데, 업무는 매일 닥쳐왔으니까. 산업과 아이템, 직무를 모두 바꾼 PM에게 매일은 새로움의 연속이었다. 충분히 알고 있었다 생각했고, 준비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전부 착각이었다. 이전까지의 경험이 모두 무용했다. 신입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모르면 모르겠다고 당당하게 말해도 되었을 텐데, 조심스럽고 내성적인 성격 탓에 그러지도 못했다. 잘 모르는 게 하나 생길 때마다 당황하며 움츠려 들었고, 아침 미팅에 들어가는 게 군대 선임을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급기야는 도망치고 싶은 마음에, 아프지도 않은데 아프다며 연차를 올린 날도 있었다. 저녁이면 연인을 붙잡고 울며 하소연했다. "PM은 내게 맞지 않나 봐. 다시 이직해야 하는 걸까." 그러나 나는 다음 날이면 다시 출근을 했고, 다시 또 한 주, 한 달을 버텨나갔다. 성과는 없었지만, 그렇게 한 달, 두 달, 시간은 정직하게 흘러갔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돌아보니, 그렇게 도망치고 싶지만 끝내 마주했던 날들, 좌절하고 하소연했지만 그럼에도 어떻게든 버텼던 날들의 숫자가 새로이 배우고 성장한 날의 숫자였다. 아무리 도망치고 싶었다한들, 아무리 좌절했다 한들, 저녁이면 그날의 그 새로움과 두려움 너머의 맥락과 본질을 정리하고, 인사이트를 도출하고, 정말로 깊숙이 이해하려고 했으니까. 어디 도망칠 수도 없어서 울며 겨자 먹기로 제 자리에서 버텨낸 거라고 생각한 그 시간이, 실은 우직하게 돌파해 나간 시간이었다. 최인아 님의 이야기처럼, "애쓰고 애쓴 것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새 업무가 자연스러워졌다. 


그럼에도 나는 분명 내일도 또 여전히 무언가를 모를 것이다. 누구나 믿고 따를 수 있는, 누구나 함께 일하고 싶은 멋진 리더나 PM이 되는 날은 아마도 당분간 요원할 것이다. 그 사실을 알기에 나는 여전히 팀원의 눈치를 보고, 자신이 없는 날에는 말을 버벅거리거나 불필요하게 길게 이어가고, 그렇지 않으려고 출근길에서 말과 생각을 정리하고, 아침 미팅이 잘 정리되기만을 기도하고, 미팅이 잘 끝나면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내 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제 내가 모르는 것, 잘하지 못하는 것, 새로운 것이 예전만큼 두렵지 않다. 버텨내면, 버텨내는 동안 어떻게든 답을 구하거나 해결해 낼 것을 알고 있으니까. 그 좌절과 두려움, 부끄러움과 막막함이 결코 나를 파멸시키지는 않는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설령 울고 싶은 마음으로 집에 돌아온다 한들, 나는 그 순간을 다시 회고하고, 찾아보고, 정리하며 내 것으로 만들어내는 걸 알고 있으니까.


왜 프로덕트 매니저로 일하고 있냐는 리크루팅 매니저의 질문에, 이제는 이렇게 답할 것 같다.

"PM은 늘 새로우니 늘 배울 거리 투성이잖아요. 실은 늘 새로운 게 조금 두렵거든요? 그런데 어떻게든 또 넘어가있더라고요. 그러면 배우게 되고요. 그래서 이 일을 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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