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을 지켜주겠다는 약속
집에서 어떤 식물을 키우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극락조화, 여인초 등을 나열하다가 얼마 전에 커피나무를 들였다고 하면 그 반응이 재미있다. ‘우리가 마시는 그 커피?’라며 재차 확인하는 질문부터 ‘농장이 아니라 화분에서도 자라네!’라는 놀라움까지.
“커피나무는 어떤 식물이에요?”
“행운의 편지 같은 식물이에요. ‘이 편지는 영국에서 최초로 시작되어 1년에 192번 돌면서 (중략) 7명에게 편지를 보내면 7년의 행운의 있을 것입니다’라는 내용의 그 편지요.”
‘커피나무랑 행운의 편지가 무슨 상관이지?’ ‘커피나무를 키우면 일이 잘 풀린다는 뜻인가?’ ‘7명한테 선물하라는 뜻인가?’ 등 부연 설명이 없다면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 수 있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커피나무가 제게 오기까지 굉장히 많은 사람의 손을 거치면서 우여곡절이 있었거든요. 그리고 정성을 다해 잘 키우면 커피 열매로 보답을 해주고요.”
그렇다, 커피나무는 키우는 과정도 즐겁지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흥미로운 사건이 많은 식물이다. 역사를 어려워해도 매일 아침 커피로 카페인을 충전하고, 커피를 즐겨 마신다면 두 눈이 번쩍 뜨일 터.
커피나무는 6~7세기경 아프리카 에티오피아 고원에서 처음 발견됐다. 11세기에는 아라비아의 예멘에서도 재배되기 시작했으며 인도를 거쳐 네덜란드와 프랑스 등 유럽에도 전파되었다. 17세기경에는 오스만튀르크가 빈 침공에 실패한 후 커피를 버려둔 채 떠났고, 이를 폴란드인 콜시츠키가 차지해 카페를 열었다. 긴 세월이 흘러 이곳은 미국인 제임스 프리먼에게 영감을 줘 지금의 블루보틀이 탄생하는 계기가 됐다. 18세기에는 중앙아메리카와 동남아시아로, 19세기 말에는 한국에 소개돼 고종이 커피를 마셨다.
까마득하게 먼 곳에서 출발해 여러 사람을 거쳐 지금 내 앞에 도착한 커피나무. 물론 그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14~15세기 예멘은 커피의 유일한 공급원으로서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 다른 나라로 커피가 유출되지 않도록 관리했다. 예멘 밖으로 나가는 종자에 열을 가해 번식력을 없애거나 묘목 반출을 금지하기도 했다.
18세기에는 프랑스 해군 장교가 한 그루의 커피나무를 싣고 마르티니크섬으로 향하던 중, 식수가 부족한 상황에서도 커피나무에 물 주는 것만큼은 빼먹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와, 지금 당장 내가 죽게 생겼는데 커피나무를 먼저 챙기다니! 극한의 상황에서도 그는 커피나무의 가능성을 알아봤던 걸까? 이 밖에도 여러 악조건에서 커피를 들여왔다는 기록은 수두룩하다. 그래서일까? 지금 내 앞에 놓인 커피나무가 역사의 산증인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커피나무가 또다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전 세계 커피 생산량의 막대한 지분을 차지하는 브라질에 서리와 폭설이 내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베트남도 가뭄과 폭설로 인해 커피 생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갑작스러운 기후 변화 탓이지만 그 원인을 제공한 건 다름 아닌 인간의 탐욕. 전부터 영국 큐 왕립식물원을 비롯한 세계 연구팀들이 이러한 상황을 우려하고 지적했지만 아직 먼 이야기로 치부해 환경 파괴가 지속됐다. 대다수가 하루를 카페인 수혈로 시작할 정도로 커피는 우리 일상에서 떼려야 뗄 수가 없다. ‘앞으로도 커피를 마실 수 있도록’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지구와의 공존을 위해서라도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
‘7명에게 편지를 보내면 행운이 온다’는 편지의 내용처럼 커피나무는 열매의 형태로 행운을 가져다준다. 단, 싹이 난 후 4~5년간 애정으로 보살폈다면 말이다. 125종가량 되는 커피나무 중 마실 수 있는 커피는 아라비카종, 로부스타종, 리베리카종이다. 이 중에서 커피 생산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 아라비카종과 로부스타종이다. 커피나무는 파치먼트라고 불리는 씨앗을 심은 후 3~4년이 지나면 아라비카종은 2~4미터, 로부스타종은 4~6미터 성장하고 꽃이 지면 초록색 커피 열매를 맺는다. 이 열매는 익으면 붉은빛이 도는데 체리를 닮아 커피 체리라고도 불린다. 참고로 커피콩이라고 부르는 부분은 그 모습만 콩을 닮았을 뿐 실은 씨앗이다.
아라비카종은 에티오피아가 원산지로 기후나 토양, 병충해에 민감하고 성장 속도가 느리지만 풍미는 뛰어나다. 로부스타종은 아프리카 및 아시아 열대 지역에서 생산되며 풍미는 조금 약하지만 병충해에 강하며 가격대가 저렴하다. 대표적인 재배지는 베트남이다. 하노이 여행 중 마트에서 로부스타 원두를 자주 목격했던 것도, 인스턴트 믹스 커피 종류가 무궁무진했던 것도 이러한 이유였다. 두 종의 차이점은 자가수분 여부. 아라비카종은 내부에서 수분하여 종자를 맺는 자가수분을 한다. 수십 그루를 동시에 심어야 자손을 남기는 로부스타종과 달리 아라비카종은 한 그루만 있어도 번식할 수 있다. 일부 학자들은 아라비카종이 전 세계로 빠르게 퍼져나갈 수 있었던 이유를 여기에서 찾기도 한다.
커피나무를 키운 지 얼마 안 된 내게는 둘을 분간하기에 어렵다. 자가수분 여부는 두 눈으로 확인하기 쉽지 않아서다. 그래서 나는 잎의 생김새로 두 종을 구분한다. 단순하지만 직관적이다. 잎이 약간 길쭉하고 표면에 윤기가 반지르르 흐르면 아라비카종, 잎이 전체적으로 둥글넓적하면 로부스타종이다. 이 기준에 따르면 내가 키우는 커피나무는 아라비카종. 아직 키가 한 뼘밖에 안 돼 무척이나 귀엽다. 이 아이들을 위해 내가 하는 거라곤 분무기로 잎에 물을 뿌려주고 일주일에서 열흘 간격으로 흙에 물을 주는 것뿐. 아주 기본적이며 최소한의 관리에도 불구하고 커피나무는 하루가 다르게 폭풍 성장하고 있다. 새잎이 이제 막 형체를 갖추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또 다른 새잎이 고개를 빼꼼 내민다. 신기할 따름이다. 집에 있는 다른 식물들은 1년 동안 나는 새잎이 손에 꼽히고 그마저도 자리를 잡는 데까지 시간이 꽤 걸리니 말이다. 새잎이 워낙 자주 나와서 이제는 자연스럽다.
줄기가 목질화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론적으로 목질화는 식물 세포벽에 리그닌이라는 물질이 축적돼서 조직이 나무처럼 단단해지는 현상이다. 커피나무를 키우며 보고 깨달은 목질화는 지지대가 없으면 ‘픽’ 하고 쓰러지는 연약한 초록색 줄기가 갈색으로 변하고 커피‘나무’라는 이름에 걸맞게 제법 우직해져 스스로를 지탱하는 힘이 생기는 것.
커피나무를 들였을 때 4년 정도 지나면 커피 열매가 열린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땐 임시로 꽂아놓은 빨대에 제 몸 하나 간신히 지탱할 만큼 여렸고 ‘우선 튼튼하게 키워보자’는 마음뿐이었다. 커피 열매까지 기대하는 건 무리였다. 그런데 ‘나 이만큼 자랐어요!’ 하며 아침마다 인사하는 커피나무를 보니 열매는 나를 위한 게 아니라 이 아이에게 ‘참 잘했어요’ 도장 같은 노력의 결실이 아닐까 싶다. 행운의 편지를 7명에게 보내는 다소 수고스러운 과정을 거쳐야 행운의 주인공이 되듯이, 커피나무도 앞으로의 성장 단계를 거쳐 탐스러운 행운의 열매를 맺기를 응원한다.
커피나무 | 꼭두서니과 커피나무속
Coffea arabica L. (아라비카) / Coffea canephora Pierre ex Froehner (로부스타)
흰색 꽃이 3~7개씩 모여 핀다. 꽃이 진 자리에 열리는 열매를 가공하면 커피 음료로 즐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