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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중에도 온통 식물 생각뿐

어딜 가도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너희들

by 김현경

여행지에 가면 멍하니 있는 시간을 꼭 갖는다. 일정이 빡빡하건 느슨하건 간에 일정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은연중에 심리적으로 압박이 되고 그렇게 되면 쫓기는 듯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정과 일정 사이에 짧게는 1시간, 길게는 2시간 정도 비워두고 그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카페 창가에 앉아 커피를 홀짝홀짝 마시며 사람들을 구경하거나 숙소로 돌아와 창 밖 풍경을 본다.


홍콩에 처음 갔을 때였다. 그땐 ‘헉’ 소리가 날 정도로 높은 초고층 아파트 창에 빨래를 널어놓은 모습이 낯설고 너무 충격적이었다. 통풍이 잘 되고 볕이 좋은 곳에 빨래를 너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는 빨래들이 떨어지지는 않을까 불안했다.


최근, 홍콩에 또 갔을 때 그보다 더 낯선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소호에 위치한 PMQ 근처 벤치에 앉아 쉬면서 건너편 아파트를 봤는데 아이비로 보이는 덩굴과 식물 화분들이 가득한 베란다에서 할아버지 한 분이 머그컵 안의 무언가를 마시며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펙터클하기보다는 평범한 쪽에 가깝다. 낯설었던 건 전 세계적으로 집값이 비싸기로 유명한 홍콩에서 베란다를 실생활에 밀접한 용도, 예를 들면 빨래를 널거나 살림살이를 보관하는 데 쓰지 않고 휴식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하는 모습을 처음 봤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름난 부촌이 아닌 평범한 시민들이 거주하는 동네에서 이러한 여유로운 풍경을 마주하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그러면서 베란다에서 종종 한숨 돌리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사람 사는 건 어딜 가나 다 똑같구나'


정해놓은 휴식 시간이 끝나서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걷기 시작했는데, 발바닥이 여전히 뻐근했다. 마사지 생각이 간절했다. 어차피 쉬는 거 제대로 쉬자는 생각에 마사지를 받기로 했다. 그 와중에도 좀 더 저렴한 숍을 찾겠다며 골목을 비집고 들어가 으슥한 길을 따라 굽이굽이 들어갔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공간을 또 발견했다. 나무들이 심어져 있고 곳곳에는 벤치가 놓인, 우리나라로 치면 근린공원이었다. 빌딩 숲 안에 이런 평온한 공원이 꼭꼭 숨겨져 있었다니! 비록 근처 회사원들의 흡연 구역으로 더 인기가 좋아 보였지만 이런 녹지는 처음 본다. 각박한 도시 생활에서 식물이 있는 공간의 의미를 다시금 깨달았다.


바르셀로나 여행 중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현재 바르셀로나의 도시 형태는 150여 년 전, 건축가 일데폰스 세르다에 의해 고안되었다고 한다. 옛 성곽이 무너지고 도시가 확장되기 시작하자 세르다는 도시가 무분별하게 개발되는 것을 막기 위해 모든 건물의 앞면을 일직선으로 맞추고 신시가지를 정사각형의 구획으로 나누었다. 이 구획을 에이샴플라라고 부르고, 이 에이샴플라는 600여 개의 만사나로 이루어진다. 만사나는 한 변이 113미터인 정사각형 블록으로, 여기에는 건물들이 가운데를 비워둔 'ㅁ'자 구조로 배열되어 있다. 주목해야 할 부분은 가운데 비워진 공간!


바로 나무를 심어 공용 정원으로 조성하기 위해 남겨둔 것이다.


숙소 베란다에서 이 공원을 봤을 때, 호텔에서 외부 조경 차원에서 만든 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바람 따라 잎이 사부작사부작 부대끼며 나는 소리로 아침을 시작했던 그때, 사람들이 주택을 지을 때 집 한가운데에 나무를 심거나 자그마한 조경을 만드는 이유를 실감했다. 그리고 실현되기는 어렵겠지만 나 역시도 집을 짓게 된다면 그러한 공간을 꼭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부부는 매년 11월에 제주도로 여행을 간다. 섬에 왔으니 바다를 실컷 보자며 해안 도로를 따라 드라이브하는 게 유일한 일정인데 최근 여기에 숲 방문도 추가되었다. 제주도는 고도마다, 지역마다 분포하는 식물군이 다채롭기로 유명한 섬이기도 하다. 기후도 육지와 다르기 때문에 서울에서 보기 힘든 식물들도 자생한다.


일정이 추가된 후, 처음으로 간 곳은 사려니숲. 바다 쪽 명소가 아니라서 늘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밀려서 결국엔 텔레비전이나 사진을 통해 봤던 곳이다. 숲에 들어서자 하늘 끝까지 솟은 듬직한 나무들에 한 번, 그 나무들로 빼곡한 광경에 또 한 번 감탄했다. 영화 <반지의 제왕>을 봤을 때 느꼈던 숲 속 특유의 신비로운 기운까지 더해져 시공간을 초월한 세계에 들어온 것 같았다. 그 분위기에 취해 걷다가 나무 한 그루를 자세히 들여다봤다.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겪었을 세월의 풍파를 꿋꿋이 이겨냈을 모습이 떠올랐고 그 의연한 자태에 감동받았다.


숲에 대한 경외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지금 나를 괴롭게 하는 것들이 하찮아졌다. 꼿꼿하게 하늘을 향한 나무들을 가로지르며 쓰러진 나무도 있었다. 들뜬 기분이 차츰 가라앉았다. 경건한 마음으로 그 앞을 지났다. 특별한 이유도 없었고 '이렇게 해야겠다'라고 생각해서 한 행동이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처음 보는 나무지만 차분한 마음으로 그동안 살아온 세월을 위로하고 싶었나 보다. 사려니숲에서의 잊지 못할 시간을 계기로 일상적으로 만나는 식물들이 소중하면서도 위대해 보이기 시작했다. 식물을 삶의 동반자를 넘어 존중의 대상으로까지 생각하게 됐다.


눈에 띄는 큰 업적을 세우지 않아도

내 앞에 놓인 시련을 꿋꿋이 이겨낸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특하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2년 전에 촬영한 사려니숲. 빽빽한 나무들 사이로 햇살이 내리 앉은 모습을 마주하게 되어 큰 행운이었다. 마치 나를 위한 선물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말이다. 그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나무들을 잘 지켜나가는 것이 우리의 숙제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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