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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도 자신만의 속도가 있다

너의 속도를 존중하지 못해서 미안해

by 김현경

극락조화를 기른 지 1년이 넘어가는 동안 새 이파리가 나는 걸 여러 번 봤다. 줄기가 어느 정도 자란 후, 둘둘 말린 이파리가 펴지고 줄기가 한 번 더 자라서 완전히 자리를 잡을 때까지 대체로 4주가량 소요된다. 어느 날, 기존에 난 이파리 사이로 뾰족하게 새 이파리가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줄기가 자라고 이파리가 펴지는 과정을 사진으로 남겼다. 그런데 속도가 이전에 비해 상당히 더뎠다. 어제보다 오늘 더 펴지긴 했는데 그 정도가 미미했다. '시간이 흐르면 알아서 잘 펴지겠거니'하며 기다리다 4주가 지났다. 전보다 이파리가 느슨해지긴 했지만 아직도 펼쳐지지 않은 부분이 더 많았다. '내가 나서야겠다'며 둘둘 말린 이파리에 손을 댔다. 그러자 이파리가 '스윽'하며 찢어졌다. 그 순간 얼어버렸다.


'아차! 내가 실수했구나!'


바로 후회가 밀려왔다. 내가 왜 그랬을까. 극락조화는 자신만의 속도로 잘 자라고 있는데 왜 쓸데없이 도와주겠다고 나서서 일을 그르쳤을까. 정말 미안했다. 만약 사람이었다면 '지금 내 속도대로 하고 있으니 괜찮다.'며 극구 거절했을 텐데.


식물처럼 사람도 자신만의 속도로 살아간다. 그걸 최근에야 깨달았고 내 삶에 적용시키는 연습을 하고 있다. 프리랜서 초반에는 들쭉날쭉한 수입도 불안했고 포트폴리오를 다양하게 쌓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싸여 하루에 2~3시간 자면서 일주일 내내 일하기도 했다. 하루를 일로 시작해서 일로 끝내니 순전히 나만을 위한 시간은 없었다. 그렇게 3년 가까이 일만 하니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가 한순간 폭발해버렸다. 전부터 해왔던 익숙한 일을 하는데도 실수가 잦았다. 몸 이곳저곳이 쑤셨고 오랫동안 앓던 편두통이 악화돼서 책상 앞에 앉아있기조차 힘들었다. 지금처럼 살다간 오랫동안 병원 신세를 질 것 같았다. 나 자신부터 챙길 필요가 있었다. 함께 일해온 담당자와 호흡을 맞추며 쌓아온 경험이 아까웠지만 일을 줄였다. 일주일 중 5일만 할 수 있을 만큼. 5일도 밤을 새는 게 아니라 오전 9~10시에 시작해서 오후 5~6시까지 해도 처리할 수 있을 정도로. 일과 개인 시간을 철저히 분리시키고 정해놓은 시간이 되면 미련 없이 노트북 전원을 껐다. 그리고 틈틈이 스크랩해둔 각종 클래스 정보를 훑어봤다. 코바늘 뜨개질, 플라워 클래스, 에코백 만들기 등 일 때문에 바빠서 당장은 못해도 나중에 시간이 날 때, 배우고 싶었던 것들이다.


그렇게 해서 배우게 된 것이 코바늘 뜨개질이다. 공방에서 기법을 배우고 집으로 돌아와 한 코 한 코 차분히 뜨기 시작했다. 똑같은 방식이 반복되어 지루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 점이 매력적이었다. 뜨개질의 진행 속도가 온전히 내 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빠르게 하고 싶을 땐 빠르게, 천천히 하고 싶을 땐 천천히 해도 문제 되지 않는다. 일할 때는 클라이언트의 의견에 따라야 했고 그가 정한 일정에 나의 속도가 결정됐는데 뜨개질을 하는 동안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컨펌받을 필요 없이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다. 베란다에서 내가 좋아하는 재즈를 틀어놓고 의자에 편하게 기대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으면 나만의 작은 세상이 펼쳐지는 기분이다. 게다가 작품을 4주에 하나 꼴로 완성하니 성취감도 맛볼 수 있다. 주로 하루에 할 일을 다 마치고 뜨개질을 하기 때문에 작업 시간을 더 확보하기 위해 일도 전보다 밀도 있게 하게 됐다.


어떤 친구는 취미 생활을 즐기는 내게 '한창 일해야 할 나이에 여유 부리는 것 아니냐'며 걱정 어린 말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취미를 통해 나만의 속도가 무엇인지를 깨달았고 더 나아가 앞으로 어떠한 속도로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서도 고민할 수 있었다.


한 뿌리에서 나는 식물의 잎도 각자 성장하는 속도가 다른데

하물며 사람이 살아가는 속도가 어떻게 같을 수 있을까?


사람마다 살아온 환경, 성격,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그 속도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빨리빨리'가 맞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느긋하게'가 맞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한쪽이 옳다고 말할 수 없다. 어느 쪽이 되었든 자신에게 맞는 쪽을 택하고 그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 선택이 틀렸다면 고치면 된다. 내 인생을 내 결정대로 살겠다는데 제3자가 비난할 권리는 없다. 자신만의 속도대로 사는 것의 궁극적인 목표는 삶에 대한 만족감이기 때문이다. 여유를 만끽하다가 다른 사람들의 속도, 특히 속도가 빠른 사람들을 보고 불안감에 휩싸였다면 평정심을 되찾고 나만의 속도를 밀어붙이거나 불안감이 해소될 만큼 속도를 내면 될 일이다. 속도를 늦추고 싶다면 그때 다시 늦춰도 문제 될 것 없다.


식물도, 사람도 나를 행복하게 하는 삶의 속도는 나에게 달려있다.



잎 왼쪽 위, 살짝 들린 부분이 내 손이 닿아서 찢어진 곳. 새 잎이 성장하고 자리를 잡아갈수록 죄책감은 커져만 갔다. 그로 인한 마음의 상처는 흉터가 되어 지금까지도 욱신욱신 쑤시곤 한다. 동시에 다음번에 같은 상황이 발생한다면 간섭하지 말고 묵묵히 응원하라는 교훈을 얻었기에 마냥 아프지만은 않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극락조화는 다섯 번째 새 잎을 틔우고 있다. 처음으로 존재감을 드러낸 지 2달 정도 됐다.


"나는 기다려줄 준비가 충분히 되어있어.

너는 오로지 너 자신에게 집중하고

너의 속도에 맞춰 건강하게 잘 자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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