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붓의 밤과 레공댄스
저녁 시간에 우붓 왕궁 쪽을 걸어가면 사람들이 어디든 많고, 한 쪽 방향을 향해 걸어간다. 길거리에서 뭔가를 호객 하는 사람들도 꽤 많이 보인다. 우붓 왕궁에서는 매일 저녁 7시에 레공댄스 공연을 하는데, 이 공연을 보러 사람들이 북적댄다. 나는 보통 관광객들을 위해서만 만들어진 여행 상품이나 서비스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그렇지만 전통 문화나 춤에 관심이 많아 레공댄스 공연을 볼까 말까 고민했다.
한국에서도 전통 춤이나 전통 악기 연주에 관심이 많아 직접 장구, 꽹과리를 치러 다닌지도 조금 됐다. 잘 치진 못하지만 언젠가는 민속촌 이런데서 공연 한 번쯤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꾸준히 배우려고 한다. 레공댄스도 전통 악기의 반주에 맞춰 춤을 추는 형식이라고 해서 잠깐 들어가서 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티켓을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우붓 왕궁에 가는 길에 서 있는 상인들은 다 레공댄스 티켓을 팔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연 시작과 거의 동시에 입장했는데, 꽤 넓은 공연장이 (텅 비어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꽉 차서 자리가 맨 뒤에 몇 자리 밖에 안 남아 있었다. 겨우 자리를 잡고 무대를 살폈다.
한국 전통 춤 공연처럼, 한켠에 박자와 멜로디 선율을 연주하는 악공들이 앉거나 서 있었고 가운데에서 무용수들이 춤을 추는 형태였다. 관객석에 불이 꺼지고 밝은 조명 아래 공연이 시작되었다. 화려한 금색 의상을 입은 무용수들이 나와서 일종의 스토리라인에 맞춰 연기를 하며 춤을 추는데, 얼마나 많이 연습했을까를 짐작할 수 없게 만드는 정교하고 일사분란한 움직임에 경탄스러움이 절로 나왔다. 아까 내가 말했던 악기 연주자들은 보통 '가믈란'이라고 불린다. 가믈란은 인도네시아의 전통 기악 합주 형태를 의미하며, 청동으로 된 타악기를 중심으로 북, 현악기, 목관악기 등이 어우러지고 사람의 목소리도 함께 합쳐지는 앙상블이다. 가믈란의 음악이 공연장 내에 울려퍼지고 이에 맞춰 세심하고 정확한 동작을 이어나가는 무용수들의 손짓, 발짓, 그리고 살아있는 표정을 보니 힌두교의 신비로움과 발리 왕실의 멋스러움이 보였다.
지금은 성인 댄서들도 춘다고 하지만, 원래는 어린 무용수들 위주로 전승되던 레공댄스는 섬세한 손끝과 절제된 발놀림, 정교한 눈동자 움직임 등을 특징으로 하는 춤의 종류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주로 5~6세의 어린 나이부터 시작해 '춤이 몸에 스며들어' 무용수와 춤이 하나가 될 때까지 반복적인 훈련을 받는다. 이렇게 혹독하고 엄격한 훈련과 연습을 거치는 무용수들은 대부분 7~8년의 수련과정을 지나13~14세가 되면 데뷔를 한다. 그런 연습과정에 대한 정보를 듣고 나니, 이들이 공연하는 건 하루의 잠깐이지만 그들이 수련해 온 그동안의 시간들을 압축적으로 보는 느낌이 들어 절로 경건해진다. 모든 예술 공연 및 스포츠가 마찬가지이겠지만, 잠깐의 박수와 각자의 목표를 위해 그 100배, 1000배, 아니 10,000배가 넘는 시간을 아낌없이 할애한다. 이런 관점으로 공연을 보니까 의상 하나, 무용수의 눈빛 하나에 더 몰입이 된다.
처음엔 15-20분 정도만 보고 나가자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왔는데, 어느덧 나는 공연에 빠져 공연 시간이 다 끝날 때까지 집중해서 보고 있었다. 공연이 다 끝나고 공연장 커텐을 걷고 밖으로 나오니까, 갑자기 현실로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발리에 있는 것 자체가 현실과 동떨어진 이국적이고 특별한 경험이었는데, 잠깐 또 어디 다른 세상에 갓다온 듯 했다.
우붓에서는 매일 밤 왕궁에서 레공댄스 공연이 열린다. 그렇지만 무용수들과 가믈란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공연하는 듯이 정성을 다해서 심취해 공연을 하고, 그들의 그 마음이 고스란히 관객들에게 가서 닿는다. 공연의 스토리를 정확히 다 파악하지 못하고, 춤의 의미를 다 알지 못하더라도 그들이 어떤 느낌과 감정을 전달하려는지는 명확하게 이해한 것 같다. 내가 맨 뒷자리에 앉아 있어서 무용수들과 악공들의 시선에 내가 닿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눈을 똑바로 마주친 것 같은 느낌이 공연 중간에 간간히 들었다. 본인의 춤과 캐릭터에 완전히 몰입해 자신감에 찬 그 시선이 불러일으킨 착각이겠지 싶으면서도 정말 눈이 마주쳤다는 상상은 진짜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