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무게

by 진키

2007년 2월 22일 배우 이은주가 죽었다.

그녀의 죽음은 모두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럼과 동시에 영원히 나이 들지 않은

그녀의 영정사진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모두가 슬퍼하는 죽음....

그때는 그 죽음조차 아름답게 느껴졌다.

우리에게 형체는 없지만

그녀는 그녀의 작품들을 통해,

그리고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통해

영원히 불멸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모두의 기억 속에

영원히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멈춰버린다는 것.

그것은 죽음이라는 슬픔과 무게를

아름다움이라는 환상으로 뒤덮어

포장해 버리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내가 언니를 처음 본 곳은

전라남도 완도 엄마의 시골이었다.

언니는 나의 외갓집에서 살고 있었다.

방학 때 시골에 놀러 가면 낡은 좌식 책상 위에

언니의 연필들이 정갈하게 깎여있었다.

시골집 상인방 위에는 졸업생이 얼마 되지 않은

시골학교에서 찍은 꺼먼 피부지만

유난히 돋보이는 외모를 가진 언니의 사진들이 걸려있었다.

지금 이 기억들이 내가 너무도 어릴 때의 기억이라

꿈속인지 상상인지 구분이 되진 않는다.

확실한 건 여름방학의 꿈처럼 함께 놀자며

언니의 이름을 목이 터져라 외치던 언니의 친구들,

우물가 앞에서 달아나는 백구를 달래고 얼러

빨랫비누로 벅벅 문질러 씻겨주던

기억들이 하나의 사진장면처럼 기억날 뿐이다.


언니를 다시 만난 건 이모 집에서였다.

오랜만에 만난 언니는

시골에서 봤던 모습과 전혀 달라져 있었다.

이제는 언니가 아니라 이모가 아닌가 하고 느껴질 만큼

언니는 성숙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모는 오래된 낡은 4층 짜리 주공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는데

이모 집 두 개의 방중에

겨우 싱글침대가 들어가는 방이 언니의 방이었다.

어린 나에게도 비좁다고 느껴지는 방이었다.

침대헤드에는 미닫이 문이 달려 있었는데

문을 열면 그 안에는 언니의 온갖 화장품이 가득했다.

침대 옆에는 행거가 놓여 있었고,

언니의 취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옷들이 가득했다.

핑크나 캐릭터 옷으로 채워진 내 옷장과는 달리,

언니의 옷들은 색도 질감도 훨씬 더 어른스러웠다.

그걸 보는 순간,

‘아—이제 언니는 나와 놀아주는 사람이 아니구나 ‘

생각했다.

놀잇감이 부족했던 그 집에서,

행거에 걸린 옷들 사이사이는 숨바꼭질할 때

몸을 숨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소였다.

그곳에 숨어 있으면,

언니 옷의 촉감이 살결에 닿았다.

복슬복슬한 털 점퍼에서는 언니가 밖에서 묻혀온

계절의 냄새와 향수 냄새가 뒤섞여

내가 모르는 세계의 냄새처럼 느껴졌다.

놀다가 언니가 오면

침대 헤드 수납장의 문이 가장 먼저 열렸다.

그 앞에 앉아 화장을 지우기 시작하면,

언니의 눈을 우산처럼 씌워 주던

짙고 예쁜 눈썹이 서서히 사라졌다.

모근만 겨우 남아 있는 눈썹을 보며

왜 그렇게 예쁜 눈썹을 매번 눈썹칼로 잘라내는지

어린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언니의 짙은 화장도, 화려한 옷들도

모두 나에게는 새로운 세계였다.

언니는 우리 엄마라면

절대 신지 않는 높은 구두를 신었다.

방음이 되지 않고 엘리베이터가 없는

오래된 주공아파트에서 또각또각하고

청량하게 구두 소리가 울리면

어김없이 새가 지저귀는 듯한 초인종 소리가 이어졌다.


장애인수당이 수입의 전부였던

이모는 틈틈이 집에서 부업을 했다.

피아노재료라는 하얀 고무줄들을 돌돌 감아서

손톱만 한 자주색깔 가죽조각을 붙이는 일이었다.

이모의 작업대는 현관 바로 앞에 있었는데

이모는 부업을 하면서 틈틈이 언니가 나가고

들어올 때마다 소리를 질렀다.

"싸돌아다니지 말고 돈을 벌어와"

"언제 정신 차릴 거야" 등등

차갑고 뾰족한 이모의 말들은 언니를 향해 꽂혔다.

이모의 모든 대화의 끝은 돈이었다.

놀 궁리만 하지 말고 이제 돈 좀 멀어와서

생활에 보태라는 잔소리였다.


엄마는 언니의 큰집에서

언니를 데려온 것이 실수라고 했다.

"시골에 있다가 큰집에 보냈지.

시골에선 학교를 다닐 수가 없었으니까.

그때 너네 이모가 보고 싶다고

우는데 어떻게 안 데려와.

그날 얼굴 보러 갔는데 두 손 딱 모으고

나한테 90도로 인사하더라.

어쩜 이리 잘 자랐나 싶었지.

그래서 나는 데려오지 말자고 했었어.

거기서 자랄 수 있게 두자고...

근데 너네 이모를 내가 어떻게 이겨.

부모가 자기 자식 본다는 걸 내가 어떻게 막아..

그냥 데려왔어 그땐 그게 최선이었어"


이모는 어렸을 때 장작을 패던 톱에

다리를 다쳤다고 했다.

치료시기를 놓쳐서

이모의 다친 다리는 성장을 멈췄다.

아이처럼 얇고 보드라운 왼쪽 다리와

매끈하고 길쭉한 오른쪽다리.

길이도 두께도 다르기 때문에

이모는 걸을 때마다 다리를 절었다.

그런 이모는 이른 나이에 결혼했고 언니를 낳았다.

사고로 이모부가 돌아가시고

언니가 유치원에 다닐 때

이모는 재혼하여 나와 동갑내기 딸을 낳았다.

내가 외갓집에서 언니를 만난 기억이 존재하듯

언니는 외할머니를 거쳐

돌아가신 이모부의 본가에서 자랐다.

이모는 언니를 보고 싶다며 데려왔지만 쉽지 않았다.

오래 떨어져 있던 시간과

재혼가정의 복잡함 속에서

언니는 쉽게 자리를 찾지 못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언니는 조금씩 겉돌기 시작했다.

걸음처럼, 이모의 마음도

한쪽이 늘 기울어 있는 사람 같았다.

몸이 불편하고, 남편을 잃고,

다시 새로운 가정을 꾸리는 동안 이모는

누구에게도 기대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언니를 대하는 마음에는

사랑보다 불안과 집착이 더 섞여 있었고

그 감정은 오히려 언니를 더 멀어지게 만들었다.


이모처럼 언니도 이른 나이로 결혼을 했다.

곧이어 나에겐 조카가 생겼다.

하지만 얼마못가 언니는 이혼을 했다.

형부가 가정적이지 못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언니의 결혼도 그리고 이혼도

어린 내가 어른들의 쉬쉬거리는 작은 속삭임들에

귀를 기울여 하나하나

짜 맞추는 퍼즐 같은 정보들이었다.

언니는 이혼 후 이모에게 아이를 맡겼다.

이모가 외할머니에게 그랬던 것처럼...

가끔 싸이월드로 보이는

언니의 집은 결혼 전 언니가 살던 집과는 달랐다.

작은 싱글침대 하나만으로도

가득 찬 방에서 사춘기를 나던 언니는

침대보다 넓은 하얀 소파에

프로방스 인테리어를 한집에서 살고 있었다.

이따금 셀프인테리어라며 언니가 직접 고른 벽지와

페인트를 정성껏 바른 소품들이 올라오기도 했다.


언니의 재혼 소식을 들은 것도 싸이월드였다.

언니는 언니의 딸보다 더 어린 새 형부의 아들을

품에 안고 찍은 가족사진을 올렸다.

사진 속 언니는 환하게 웃고 있었지만,

그 미소를 보면서도

나는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서늘했다.

재혼 후에도 언니는 조카를 데려오지 못했다.

언니가 밤마다 짙은 화장을 지우던

이모 집의 그 좁은 침대 위에는,

언니의 딸인 조카가 잠들었다.

가끔 조카를 보러 이모 집에 가면

언니와 마주칠 때가 있었다.

언니는 조카를 잘 돌봐줘서 고맙다며

늘 나에게 용돈을 건넸다.

그 손에 쥐어진 지폐보다 더 따끈했던 것은,

말로는 다 건네지 못한 언니의 마음이었다.

시간이 지나 알게 된 건,

그 선택에는 감정보다

훨씬 더 단단한 현실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이모는 몸이 불편했고,

장애수당과 부업으로 버티는 삶이었다.

조카를 돌보는 일은 이모에게는

손녀를 사랑하는 마음이자, 동시에

그 집의 생계를 지탱하는 작은 기둥이기도 했다.

누가 옳고 그르다고 말할 수 없는 문제였다.

가난은 때때로 마음보다 먼저 선택을 강요한다.

이모도, 언니도,

누구도 충분히 행복해질 수 없었던 자리에서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버티고 있었을 뿐이다.


2013년 1월 10일

언니가 죽었다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배우 이은주가 선택한 그 방법으로 언니는 죽었다.

언니의 이름도 이은주였다.


전화를 받고 우리가 간 곳은 병원도,

장례식장도 아니었다.

우리는 곧장 경찰서로 향했다.

형부는 고개를 깊이 숙인 채 조사를 받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 당장 제대로 말하라”라고

울부짖는 이모를 붙들어 달래는 동안에도

우리의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날 저녁, 두 사람은 사소한 말다툼을 했다고 했다.

형부는 잠시 감정을 식히겠다며

집을 나섰다 돌아왔다고 했다.

다시 말을 건네 보려고 방으로 들어갔을 때는

이미 언니의 몸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고 했다.

우리는 언니의 마지막 시간을 침대도,

영정도 아닌 경찰서의 차가운 조사실에서 들었다.

보통의 장례식엔 다양한 감정들이 공존한다.

하지만 언니의 장례식은 달랐다.

모두가 아무 말이 없었다.

엄마를 잃은 5살 조카를 보며 사람들은

이제 어떻게 하냐며 아이를 안고 울었다.

엄마가 떠난 것도 실감하지 못하는 아이는

자신을 껴안고 우는 사람들을

멍한 표정으로 내려봤다.

그리고 그날 조카는 처음으로

자신의 친부를 만났다.

너무도 닮았지만

이혼 이후 만난 적 없던 아빠를 처음 만났다.

하지만 형부 또한 새로운 가정을 꾸렸고,

아이에게 그 슬픔을 덜어줄 만큼의

여유도 시간도 없었다.

장례식이 끝난 후

조카는 다시 이모의 집으로 돌아갔다.


언니의 죽음 이후,

그간 환상으로 포장되었던

아름다운 죽음의 기억이 완전히 지워졌다.

남겨진 자들이 짊어지는 무게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 기억 속 언니의 모습은 지금의 나보다 어리다.

내가 꿈꿨던 반짝이는 나이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언니는 떠났다.

이름이 같았던 두 사람.

만약 언니가 두 번째 이모부의 성을 따랐다면

이름이 달랐다면 삶도 달라졌을까.

엄마 말대로,

큰집에서 그대로 살았다면 미래가 달라졌을까.

죽음 뒤에 남는 건 늘 아쉬움이다.

마치 그 삶이 조금만 다르게 흘렀다면

다시 쓸 수 있었던 이야기인 것처럼…..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