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족혐오
따뜻한 봄이 시작되는 어느 날,
입덧은 예고 없이 시작됐다.
내 안에 새 생명을 품었다는 신비로움보다도,
뛰고 있는 심장 소리보다도
입덧이 먼저였다.
음식 냄새를 맡은 후에
갑자기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참으며
예쁘게 총총 뛰어가는
드라마 속 여주인공의 모습은 비현실적이었다.
현실의 입덧은
내 몸 안의 모든 내장이
함께 쏟아져 나오는 느낌에 가까웠다.
위액마저 남김없이 비워내는 것이
그날의 일상이었다.
나는 침대와 한 몸이 되어 지냈다.
내가 어떤 생명을 품고 있다는 사실은
신비로움이 아니라
고통의 형태로 먼저 닿았다.
그 사이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할 생각들이 스쳤다.
차라리 아이가 사라지면
이 고통도 끝날까.
모성을 가진 엄마로서는
절대 해서는 안 될 상상이었고,
나는 그 생각과 함께
수없이 죄책감과 싸워야 했다.
아이는 세상 밖으로 나왔다.
품에 안은 아이는
나에게서 유약한 타인에 불과했다.
보호해야 할 존재이기는 했지만,
본능적인 애착이나 벅찬 감정으로
곧바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육아 전문가의 말처럼
나는 아이의 완벽한 독립을 전제로
육아를 시작했다.
의존하지 않는 아이,
스스로 설 수 있는 아이.
그것이 내가 설정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거리처럼 느껴졌다.
아이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며
닮은 구석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생각과 달리
사람들은 종종 우리 모녀가 닮았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 안쪽이 작게 움츠러들었다.
닮았다는 말은
기쁨이나 축복처럼 들리지 않았다.
외면해 두었던 무언가가
다시 내 앞에 놓인 느낌이었다.
아이는 비교적 순했지만 예민했다.
동생이 태어난 뒤
아이는 매일 여러 가면을 갈아 끼우듯 달라졌고,
그 변화가 나를 지치게 했다.
혹시라도 내가 서운하게 하거나
아이 스스로 마음이 차지 않을 때마다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엄마는 나 안 사랑하나봐.”
그 말은 늘
나의 발끈 버튼을 눌렀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고통과 희생과 사랑을
이미 충분히 주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아이를 마주할 때
서운함이 먼저 올라왔기 때문이다.
분명한 건
나는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반쪽짜리 엄마에서
온전한 엄마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나는 아이를 사랑한다.
그런데 아이 앞에서
나는 자주 불편해졌다.
아이의 표정, 말투, 고집 속에서
내가 싫어했던 나를 마주칠 때마다
그 불편함은 극심해졌다.
아이를 향한 감정은
사랑과 혐오가 나뉘지 않은 상태로 존재했다.
가까워지면 숨이 막히고,
멀어지면 불안했다.
동족혐오는
같은 피를 가진 존재를
본능적으로 밀어내는 감정을 가리킨다고 한다.
가족이나 혈연처럼
너무 가까운 관계에서
더 선명해지는 마음.
이 단어는
아이보다 먼저
나에게 닿아 반응했다.
딸은 엄마를 닮아간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불쾌한 예감이 따라왔다.
내가 나를 견디지 못했던 시간들처럼
이 아이도 언젠가는
나를 견디지 못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
우리는 서로를 가까이 두고
서로를 밀어내면서
같은 공간에 남아 있다.
사랑과 혐오가
아직 분리되지 않은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