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 덕순이뿐만 아니라 많은 아기들이 엄마를 거짓말쟁이로 만들 때가 있다. 엄마랑 단둘이 있을 때에는 유난히 보채고 울던 아기가 손님이 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온순해질 때다. 아이 기르는 게 쉽지 않다며 지친 내색을 했던 엄마는 그 순간 순한 아이도 감당 못하는 엄살쟁이와 거짓말쟁이가 되어 버린다.
"애기가 너무 순한데?"
분명 우리 아기가 순하다고 칭찬해주는 건데 어딘가 묘하게 서운하고 억울하다. 방전된 체력과 멘탈 때문에 예민해진 탓이겠지 하며 넘기고 싶지만 늘 저 말 뒤에 따라와 가슴에 꽂히는 비수가 있다.
"애기가 너무 순한데 뭐가 힘들어?"
수도 없이 들었으니 이제 익숙해질 만 하지만 매번 이 말은 지금도 적응이 안 된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억울함과 서운함이 밀려오는데 뭐라 설명하기가 참 어려운 감정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생각이 참 많은 사람이라, 그저 한 귀로 흘릴 수도 있는 이 말을 계속 곱씹어보며 내가 왜 매번 힘들어하는지 고민했다. 그리고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이야깃거리를 또 하나 만들어내었다.
남의 일은 항상 결과론적으로 보이기 마련이다.
때가 되면 알아서 배가 부르고 알아서 아기를 잘 낳고 일 년 후 아기는 알아서 잘 커서 첫 돌을 맞이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과정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무엇하나 쉬운 게 없다. 글을 쓰는 오늘, 태어난 지 256일째 되는 덕순이도 지금에 이르기까지 엄마인 나에겐 수많은 역경과 고난이 있었다.
그중 하나를 꼽자면 이유식을 말하고 싶다.
덕순이는 5개월 즈음부터 이유식을 시작했는데 유독 심하게 먹는 것을 거부했었다. 다른 아이들이 60ml를 거뜬히 먹을 무렵, 우리 덕순이는 30ml조차 비우지 못했고 기분이 좋지 않은 날에는 소리를 지르며 울고 악을 썼다. 내가 정성을 쏟아 만든 이유식을 덕순이가 모두 엎어버리고 내던질 때, 나는 밀려오는 화를 주체할 수 없어 우는 아이 앞에서 같이 소리 내 울었다. 아기가 잘 때 같이 쉬지도 못하고 고생해서 만든 밥이 그렇게 쓰레기가 되는 게 감당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8개월이 지난 지금, 덕순이는 매일 120ml씩 아침저녁 두 끼를 거뜬히 비운다. 어느 날은 양이 부족한가 싶을 정도로 잘 받아먹기도 한다.
남들이 보기엔 그냥 시간이 흐르니까 잘 먹게 된 것 같겠지만, 이렇게 되기까지 나는 수도 없이 이유식을 만들고 버리고 아까워서 먹어도 보고 힘들어서 울기도 했다.
수저가 맘에 안 들어서인가 해서 이유식 스푼을 종류별로 사보고 이유식의 묽기, 고기의 종류, 데우는 방법, 먹는 시간 등 안 해본 것이 없을 정도로 많은 것들을 시도해 보았다. 덕순이가 지금처럼 잘 먹게 된 것은 시간이 해결해준 것이 아니라, 나의 피 땀 눈물 덕분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마치 백조가 물 위에 우아하게 떠 있기 위해 물아래에서 쉴 새 없이 발짓을 하는 것처럼, 나는 지금의 건강하고 예쁘고 사랑스러운 덕순이를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쉴 새 없이 발짓을 해왔다.
그래서일까. 물아래를 보지 않고 물 위에 떠 있는 아름다운 백조를 보며 누군가가 무심코 던지는 말에 나는 지금껏 내가 고생해온 것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서운함이 몰려온 것이었다.
세상에 순한 아기는 있어도 안 힘든 아기는 없다.
한 생명을 책임진다는 것은 엄마에게 엄청난 노력과 희생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덜 힘들 순 있어도 안 힘들 순 없다. 하지만 엄마 주변에는 '순하다'와 '안 힘들다'를 구분 못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아기가 순하면 순하다고 예뻐해 주면 담백하게 끝날 대화를 굳이 힘들게 없다는 사족을 붙여 엄마를 슬프게 한다.
"맞아요. 우리 아기 참 순해요. 하나도 안 힘들어요."
엄살쟁이가 되느니 나는 차라리 이렇게 말한다.
아니라고, 우리 아이 기르는 거 쉬운 거 아니라고, 매일매일 힘들다고 말해봤자 앞서 얘기한 이 심오한 감정을 이해받지 못할 게 뻔하고 괜히 내 예쁜 아기만 흉보는 것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은 남편을 포함해서 같은 처지에 있는 엄마들 뿐이지만, 그들이 있어 나는 내 심정을 이해받고 공감을 얻기 때문에 힘을 낼 수 있다.
때문에 날 이해해 줄 것이란 기대가 없는 사람들에겐 굳이 길게 얘기할 필요가 없다는 게 숱한 비수에 꽂힌 상처들 끝에 내린 나의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