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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덕순 May 17. 2022

뱃속에 있을 때가 좋을 때다는 말이 듣기 싫어요.

"그래도 뱃속에 있을 때가 좋을 때다."

2021년, 그러니까 지금의 내 딸을 뱃속에 품었던 임산부 시절에 참 많은 사람들에게 들었던 말이다. 가까운 가족부터 아기를 낳아본 적도 없는 남자 지인에게까지. 위로라기에는 묘하게 기분이 나쁜 이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그때마다 나는 생각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저렇게까지밖에 말할 수 없는 걸까? 좀 더 따뜻한 표현들이 많을 텐데, 왜 모두들 하나같이 어느 유행어처럼 저 말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이 말하는 걸까?'


넓은 이해심으로 저 미운 말을 예쁘게 소화하기에는 내 코가 석자였다. 초기 때는 입덧 때문에 매일 헛구역질을 하며 회사에서 남몰래 쏟아지는 졸음을 참아야 했고, 후기로 갈수록 배는 부풀어올라 남산만 해졌다. 몸집이 커진 아이는 시도 때도 없이 방광을 압박해서 밤새도록 화장실을 들락날락해야 했고 다리에 피가 통하지 않아서 비명을 지를 것만 같은 통증을 동반한 쥐가 자주 났었다.

이렇게 내 몸이 힘든데 지금이 좋을 때라니?

위로는커녕 앞으로 더 힘들 일만 남았다고 놀림받는 기분이었다. 사는 게 힘들어서 지친 사람한테 '힘내요. 어차피 앞으로 더 힘들 일만 남았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당신은 늙고 더 힘들어질 테니 지금이 제일 좋을 때에요.'라고 하면 공감능력이 결여된 소시오패스처럼 보일 텐데, 임산부에게는 마치 저 말이 인사치레처럼 흔하게 들린다. 나는 그래서 저 말이 듣기 싫었다. 나중에 힘든 건 나중일이고, '지금' 내가 힘든 걸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매일매일 전쟁 같은 육아를 치르는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적어도 나에겐 저 말이 맞았다.

비록 힘든 임신 과정을 모두 거쳤지만, 나는 그중에서도 운이 좋은 편이었다. 임신성 당뇨나 소양증처럼 임신 때문에 생기는 불편한 병들도 없었고 의사 선생님이 인정한 건강한 체질이어서 아이를 낳을 때까지 일상생활을 제약 없이 누렸다. 아이와 함께인 몸이었지만 한 몸이었기 때문에 자유로웠다.

그에 비해 육아는 훨씬 고되고 힘든 나날들의 연속이다. 나는 조리원을 퇴소했던 그날부터 오늘까지 한 번도 밤에 마음 놓고 푹 자본 적이 없다.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매일 아기를 돌보니 이곳저곳 아프고 집안일은 산더미처럼 쌓다. 주말에 바람 쐬러 나들이를 가려해도 임산부 시절엔 그저 데이트하는 것처럼 내 몸만 챙겨 나가면 됐었는데 지금은 아기 짐만 한 보따리에, 아기의 컨디션까지 잘 봐야 한다. 혹여라도 아기가 피곤한 날에는 그날 나들이는 실패다. 서둘러 집에 돌아와 목욕을 하고 일찍 재워야 하기 때문에 바깥에서 여유롭게 저녁 식사를 할 수도 없다. 모든 체력을 다 써버린 탓에 아기가 잘 때 같이 뻗어버리기 일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속에 있을 때가 제일 편하다'라는 말이 듣기 싫다.

저 말은 엄마 본인이 할 수 있는 말이지, 주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식당에서 어느 모르는 사람이 지나가다가 내 자리에 있는 물컵을 쏟아서 옷이 젖었다고 생각해보자. 그런데 그 사람이 나에게 '사람이 살다 보면 그럴 수 있죠.'라고 말한다면? 어이가 없고 기가 막힐 것이다. 그 말은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 옷이 젖은 내가 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나는 앞서 얘기하는 저 미운 말도 똑같은 입장이라 생각한다. 주변 사람들이 임산부에게 '뱃속에 있을 때가 좋을 때다.'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육아에 지친 엄마가 임신 시절을 돌이켜 생각하며 '뱃 속에 있을 때가 좋았네.'라고 할 수 있는 말이라는 것이다.


"온탕에서 열탕 본다고 냉탕 되냐."

뼈 있는 말을 재치 있게 풀어내는 개그맨 유병재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이 말을 백번 천 번 공감한다.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열탕 같아서 돌이켜보면 냉탕 같았던 시절도 분명 있다. 하지만 그렇게 느끼고 말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당사자뿐이다. 주변 사람들이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나중에 혹시라도 임신한 지인을 만나게 되면, 그리고 그 지인이 임신으로 힘든 고충을 털어놓는다면, 나는 '나도 해 봤는데~, 라떼는~, 그래도 지금이 좋아~.' 같은 미운 말들을 모두 집어넣고 담백하게 얘기해 주고 싶다.

"너무 힘들지? 고생이 많아. 조금만 더 버티면 예쁜 아기를 만날 수 있을 거야.'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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