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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덕순 Jun 27. 2022

잔소리에 관한 심오한 고찰

육아를 하다 보면 피할 수 없으나 즐길 수도 없는 것이 있으니 바로 잔소리다.

참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경험과 주워들은 경험들을 정답으로 믿고 먼저 구하지 않은 조언들을 쏟아낸다. 나 역시 육아 스트레스만큼이나 견디기 힘든 이 잔소리들에 지금도 시달리고 있다.


이 몹쓸 잔소리들은 도움은커녕 늘 나에게 분노를 일으키지만, 나는 또 생각에 생각을 더하며 이 잔소리들의 정체를 파헤쳐보았다.

내가 무엇을 잔소리라 여기는지, 누가 말하는 잔소리가 더 짜증이 나는지, 어떻게 말했을 때 그 짜증이 더 증폭되는지 등... 사는 데엔 그다지 도움은 안되지만 글을 쓰는 데는 꽤나 흥미로운 소재거리를 만들어 함께 나누게 되었다.




나는 잔소리란 '먼저 구하지 않았지만 좋은 의도로 포장해서 건네는 모든 조언들'이라 정의를 내렸다.

아무리 맞는 소리라도, 피가 되고 살이 될 지라도 청자가 먼저 구하지 않은 조언을 한다면 그것은 다 잔소리라 생각한다. 귀를 막고 '그만!'이라고 외치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잔소리는 '나 좋자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 다 너를 생각해서 하는 소리'라는 착한 의도 덕분에 보기 좋게 정당화된다.

잔소리를 하는 사람에겐 듣는 사람이 원하지 않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다. 하루빨리 내 의견을 설파하여 말을 듣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본인의 생각만이 맞다고 철석같이 믿기 때문에 자기 뜻대로만 해준다면 언젠가 듣는 사람도 본인에게 고마워할 것이라 생각한다.


육아에 관련된 것이라면 누구나 잔소리를 할 수도, 들을 수도 있다. 육아는 각자의 경험을 통해 저마다의 정답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아기가 태열 때문에 고생했던 적이 있는 엄마라면 '아기는 시원하게 키워야 해.'라고 조언을 하겠지만 반대로 아기가 감기 때문에 고생했다면 '아니야. 아기는 따뜻하게 키워야 해.'라고 조언을 할 것이다. 심지어 아기 얼굴도 모르는 건너 건너 사이일지라도 누구네 아기가 보리차를 먹고 설사가 멎었더라 하는 얘기를 들었으면 '내가 들었는데 보리차가 좋다더라.' 하고 쉽게 조언을 내릴 것이다.


육아 잔소리에 시달리는 수많은 엄마들 중 하나로서 나는 스스로에게 이중성을 느낀 적이 많다.

분명 앞서 말한 '먼저 구하지 않은 조언들'을 받는 건 똑같은데 어느 사람에겐 그것이 그렇게 불쾌하지 않았고, 또 어느 사람에겐 몹시 기분 나쁘게 받아들여졌다. 똑같은 잔소리도 상대방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콩으로 된장을 만들어라' 해도 듣기 싫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똥으로 된장을 만들어라' 해도 듣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어떤 잔소리들이 나에게, 그리고 엄마들에게 '덜 불쾌하게 받아들여지는' 면죄부를 받는 것일까?

만일 내가 그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게 된다면, 나 역시 실수로라도 누군가에게 잔소리를 하게 된다면 조금이나마 면죄부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 '사는 데엔 필요 없는' 고찰을 계속 이어갔다.




엄마인 나에게 육아 잔소리를 해도 면죄부가 생기는 사람들은 아래와 같은 특징이 있었다.


첫째, 아기보다는 엄마를 걱정하는 잔소리를 하는 사람들이다.

'잘 먹어라'와 '잘 먹여라'의 차이란 엄마에게는 하늘과 땅 차이다. '잘 먹어라'는 끼니도 못 챙겨 먹는 엄마를 걱정하는 마음이지만 후자는 어쩐지 엄마가 힘든 건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아 서운함이 밀려온다. 또한 아기를 생각하고 걱정하는 것은 이미 엄마가 분히 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걱정까지 떠안고 싶지 않다.


그리고 둘째, 나와 친한 사람들이었다.

친밀감이 깊을수록 나에게 잔소리를 해도 불쾌한 기분이 덜 하다는 걸 느꼈다. 나는 이와 관련해서 최고의 수혜를 받은 사람이 우리 친정 엄마라고 생각한다.

우리 엄마는 내가 덕순이를 조금만 얇게 입혀도 '애 춥다.' 하며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어느 날엔 나도 못 참고 화를 내며 싸우기도 했지만 엄마와 나는 다퉈도 금방 화해하고 마음의 앙금이 남지 않았다. 가깝기 때문에 쉽게 싸우지만 쉽게 화해할 수도 있어서 잔소리를 들었을 때 생기는 불쾌한 감정을 그 자리에서 소화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세 번째, 나와 같은 처지인 사람들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육아 중인 엄마들을 말한다.

"덕순이 옷이 좀 불편해 보이는데? 집에선 편하게 내복을 입혀봐."

내가 SNS에 덕순이의 사진을 올렸을 때 비슷한 개월 수의 아기를 기르는 친구가 '잔소리'를 한 적이 있었다. '우리 옷 어떤지 봐주세요~'하고 올린 사진이 아녔던지라 처음엔 당황했지만 다시 보니 정말 덕순이의 옷이 무언가 불편해 보였다.

만일 친구가 아기를 기르는 입장이 아니었다면 '흥. 네가 뭘 알아.' 하는 뾰로통한 마음으로 잔소리를 그저 넘겼겠지만 같은 아기를 기르다 보니 어쩐지 내가 잘 모르는 부분을 알 것 같았다. 나처럼 아기를 기른다는 사실만으로도 믿음이 생긴 듯했다.


마지막으로 전문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대표적으로는 의사 선생님이다.

만삭 임산부 시절, 나는 자연분만을 해야 한다는 잔소리를 참 많이 들었다. 이게 다 나를 위한 거라며 자연분만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어쩐지 나는 그 말들을 한 귀로 흘리게 되었다. 그 당시 내가 믿고 따르는 건 오로지 한 분, 나를 담당해주시는 의사 선생님이셨다.

그분은 나와 친하지도 않고 같은 임산부도 아니었지만 오랜 시간 동안 나와 같은 수많은 산모들을 진찰해오셨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믿음이 갔었다. 36주 차 진료를 마치고 그분께 분만 여쭤봤을 때 그 선생님은 나를 무척 편하게 해 주셨다.

"지금 아기와 산모 상태로는 자연분만을 충분히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원한다면 제왕절개도 가능해요. 둘 다 가능하니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생각해보세요."

선생님의 열린 조언 덕분에 나는 마음 편하게 자연분만을 선택했고 아기를 잘 낳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 많은 면죄부들 중 한 가지도 해당되지 않은 사람은 누구인가?

엄마인 나와 별로 친하지도 않고 아기를 기르는 것도 아니고 전문적인 지식이 있지도 않은 사람들. 그사람들이 엄마를 걱정하는 것도 아니고 아기를 걱정하며 엄마를 들들 볶는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대부분 앞서 얘기한 면죄부 중 하나도 갖고 있지 않으면서 했던 잔소리를 또 하고 또 하면서 불쾌지수를 더 높이는 능력까지 있다.




지금까지 신나게 잔소리하는 사람들을 비판했지만 어쩐지 내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다.

'그러면 는? 나는 안 그럴 자신이 있을까?'

나는 그동안 잔소리를 듣는 처지였기 때문에 마음껏 만을 토로할 수 있었지만 이젠 잔소리를 하는 입장에 더 가까워질 것이다. 그때는 지금의 나를 돌아보며 민망한 헛웃음을 짓지 않을까 정이 들었다.


나는 우리 아이가 자라면서 한 번도 잔소리를 안 할 수 있을까?

나도 '그 사람들'처럼 '다 너를 위해 하는 거야.' 하며 원치 않은 조언을 퍼부으며 아이를 힘들게 하지 않을까?


내 주변에는 아주 가끔 본받고 싶은 사람들이 있었다. 나에게 굳이 조언을 하지 않아도 닮고 싶은 아우라가 풍기는 사람들이었다. 는 그것을 '권위'라고 생각한다. 지위나 힘으로 굴복시키지 않아도 마음으로 존경하게 돼서 따르고 싶게 만드는 사람들.

아이가 크고 내가 점점 잔소리가 많아지려 할 때면 나는 스스로를 돌아보며, 내가 과연 아이에게 잔소리를 할 수 있는 권위와 면죄부가 는지 생각해 봐야겠다. 잔소리를 굳이 하지 않아도 아이가 알아서 나를 본받고 따르고 싶을 만큼 훌륭한 어른이 되어있는지 반성해 봐야겠다.


원치 않는 조언들에 시달리는 지금을 기억하고 아이가 정말 조언이 필요한 순간에 도움을 주는 현명한 엄마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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