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덕순 Jul 20. 2022

진짜 어른 엄마가 되고 싶어졌다.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나는 날이면 나는 늘 주눅이 들었다.

평범한 회사원인 나에 비해 다들 스펙이 화려했기 때문이었다. 그중 의사 친구는 늘 나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마냥 장밋빛 인생만 펼쳐질 것 같은데 그 친구는 만나면 늘 힘든 얘기를 늘어놓았다. 밤을 꼴딱 새우고 그다음 진료를 보느라 힘들고, 본인을 무시하는 환자부터 은근한 기싸움을 벌이는 간호사들까지... 별의별 고충이 많았다.

 

'치. 그래도 너는 의사잖아. 억대 연봉에다가 여기저기서 모셔가는 '사'짜인데.'

친구의 불평을 들을 때마다 난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나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공부를 잘하고 똑똑했던 그 친구가 몹시 부럽다 못해 자격지심이 느껴졌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의사의 진짜 이야기를 담은 웹툰 <내과 박원장>을 보게 되었다.

의사를 꿈꾸며 독하게 공부해서 의대에 진학한 주인공 박원장은 전문의가 되기 위해 갖은 고초를 겪다 마흔 줄이 다되고 탈모까지 생긴다.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멋진 모습을 존경해서 선택한 삶이지만 그의 삶은 생각만큼 멋지지도, 화려하지도 않고 늘 고난의 연속이다.

처음에는 박원장의 고난이 너무 재미있게 묘사되어 낄낄거리면서 보았지만, 갈수록 내가 부러워했던 의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미디어에서 묘사하는 의사의 멋진 모습 뒤에는 생명을 책임져야 하는 무거운 중압감, 그리고 언제 비난의 화살이 꽂힐지 모르는 위험이 산재했다.


'혹시 내가 부러운 마음에, 걔한테 해서는 안될 말을 하진 않았을까?'

그제야 나는 내 친구의 말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고, 혹시라도 내 자격지심이 비치는 말을 내뱉진 않았을까 걱정이 되었다. 원래 맞는 사람만 기억하고 때린 사람은 기억을 못 하는 법이라, 내가 정확히 어떤 말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아마 친구가 고충을 털어놓았을 때 전혀 공감을 못하겠다는 심술궂은 내 표정만큼은 못 숨겼을 것이다.


엄마가 된 지금, 나는 그 친구에게 더욱더 미안해진다.

엄마가 되고 나니 그 친구에겐 내가 베풀지 못했던 '이해와 공감'을 부르짖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까지 육아에 지친 엄마의 삶을 한 번이라도 이해해주고 공감해달라며 글을 써왔다. 내가 그 친구의 불평을 공감하지 못하다가 <내과 박원장>을 보고 다시 생각하게 된 것처럼, 엄마의 삶을 자세하고 현실적으로 이야기해서 이 글을 읽은 누군가는 엄마의 삶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 글의 마지막으로, 나는 스스로를 돌아보며 나 또한 누군가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어른이 되고자 다짐해본다.





육아는 아기에게 체력과 정신을 모두 쏟기 때문에 힘들지만, 나는 그것보다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힘든 것을 이해받지 못하고 무심코 던진 말에 상처받는 것이 더 힘들었다. 아무도 날 제대로 이해해 주지 않는다는 생각은 스스로를 더 외롭게 만들었다.

'이해와 공감을 받지 못하는 삶'

이것보다 더 외롭고 힘든 인생이 또 있을까? 나는 엄마가 된 후 지금까지 그 불행의 늪에 빠지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던 것 같다. '나는 이래서 힘들어요.' 하며 글을 쓰고 비슷한 처지의 엄마들과 친해지고...


하지만 누군가가 나와 다른 삶을 공감해주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첫째로 나와 다른 삶을 속속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 힘들고, 둘째로 내가 오로지 정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힘들 때문이다.

육아를 예로 들자면 엄마가 되어본 적이 없어서 엄마의 삶을 잘 모르거나, 자기가 해낸 육아만이 정답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에게 자주 상처를 주었다. 

자는 육아가 얼마나 어떻게 힘든 건지 체감이 안되기 때문에 무심코 말을 던지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의사의 힘든 삶을 직접 겪지 않아 모르기 때문에 친구를 이해 못 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나는 '육아가 이래서 힘들어요.'의 '이래서'를 풀어내고 싶었다. 하루 종일 아기와 붙어있는데도 왜 밥 먹을 시간이 없는지, 별 것도 아닌 일에 왜 예민해지고 슬퍼하는지 내가 겪은 경험을 통해 이해와 공감을 얻고 싶었다.


하지만 문제는 후자였다. 자기가 해낸 육아만이 정답이라 생각하는 사람들.

생각해보면 육아의 트렌드는 스마트폰처럼 빠르게 변한다. 이유식 지침은 매번 새롭게 개정되고 아기를 따뜻하게 입히는 게 좋을지 아니면 시원하게 입히는 게 좋을지, 같이 자는 게 좋을지 아니면 떨어져서 자는 게 좋을지 등의 세세한 양육 방식에서도 우리네 윗 세대와는 다른 방식들이 쏟아져 나온다. 변하는 속도는 세대갈등을 일으킬정도로 빠르다.


그러나 이미 본인만의 정답으로 육아를 해낸 사람들은 그 변화를 인정하기 쉽지 않다. "나도 해봐서 아는데."

이 말이 늘 머릿속에 맴돈다. 지금 아기를 케어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어설프고 답답해서 뭐라고 고쳐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이 사람들에게 이해와 공감을 얻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그들에게 이해와 공감이란, 이미 정답이라 믿고 있었던 본인의 육아 방식을 '틀렸다'라고 승복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육아를 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내 글을 읽고 '아-이런 게 힘들 수도 있구나.'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쩐지 육아를 오래전 했던 사람들은 '나는 더 힘들 때 해봤는데? 세상 참 좋아졌는데 뭐가 이렇게 힘들다 해?'라 생각할 것 같아 주눅이 든다.




생각해보면 굳이 육아가 아니더라도 우리 사는 삶이 다 그런 것 같다.

다 각자의 힘든 고충이 있지만 서로를 이해해주고 공감해주는 게 참 어렵다. 회사에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다니는 직장에서도 '라떼는'을 입에 달고 사는 수많은 꼰대들이 계셨고 나 또한 누군가에겐 '나도 해봐서 아는데?'라고 말하는 꼰대였을 것이다. (누구에게 그랬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이 글을 빌어 사과하고 싶다.)


처음에는 그저 '엄마가 이래서 힘들어요. 좀 알아주세요.'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마냥 사랑스럽기만 할 것 같은 내 딸과 함께하는 하루하루가 왜 힘든 건지, 왜 우울한 건지 누군가가 이해해주길 원했다.

그리고 글을 쓰면서 내 바람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깨달았다. 나는 과연 누군가의 힘듦을 내 힘듦처럼 받아들인 적이 있었나 반성하게 되었고, 나 또한 누군가를 이해해주는 '진짜 어른인 엄마'가 되고 싶어졌다.


'엄마. 나 오늘 이런 일이 있었어.'

내 딸이 나중에 커서 엄마인 나에게 말수가 적어지는 날이 오더라도, 가끔은 이렇게 나에게 말을 건네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내가 만약 딸에게 무한한 이해와 공감을 주는 엄마가 된다면 내 딸도 나중에 아주 독한 사춘기가 오더라도 조금은 나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주지 않을까? 그리고 아주 나중에 내 딸이 지금의 나만큼 나이를 먹고살면서 정말 힘든 순간들이 찾아올 때, 나에게 의지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랑하는 내 딸 덕순아. 나는 항상 너의 마음에 귀 기울일게. 네가 어떤 마음일지라도 항상 이해하고 공감할게. 네가 느끼는 모든 감정과 생각은 존중받야 마땅하다는 것을 내가 알려줄게.'

 내 딸에게 어른다운 어른, 엄마다운 엄마가 되고 싶은 바람을 담아 오늘도 나는 힘을 내본다.


























 







이전 04화 잔소리에 관한 심오한 고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