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그래 왔듯이 아침에 일어나 덕순이의 기저귀를 갈고 빨랫감을 한 데 모아 세탁기를 돌릴 참이었다. 덕순이가 보챌까 봐 마음이 급해져서일까, 그냥 덤벙대는 습관이 나온 것일까?
난데없이 무릎을 베란다 벽에 세게 부딪히고 너무 아파 주저앉았다. 혼자 다치고 우는 건 애들만 하는 건데 서른이 넘은 나는 그 자리에서 엉엉 울었다. 아파서, 그리고 서러워서.
나는 단단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물러 터져서 쉽게 무너지는 사람이다. 오죽하면 남편이 나를 부르는 애칭이 '두부'일까. 하얀 강아지한테 어울릴법한 이름이지만, 멘탈이 약한 내가 꼭 쉽게 으스러지는 두부 같다고 붙여준 별명이다.
하지만 엄마는 단단해야 한다. 몸과 마음이 단단하지 않으면 엄마에게 주어진 수많은 임무들을 완수할 수 없다. 아기가 배고프지 않도록 제 때에 식사를 챙겨야 하고 엉덩이가 짓무르지 않도록 기저귀를 자주 갈아줘야 하고 푹 잘 수 있도록 재워줘야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육아가 참 힘들다고 느낄 때는 일이 많아서가 아니라 바로 '내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고 느껴질 때'인 것 같다. 아기는 노력한 만큼 성과가 나오지도 않고 계획대로 움직이지도 않는다. 잘 먹고 잘 자던 아기가 어느 날 갑자기 먹지도 자지도 않고 심하게 보채는데 이유를 모를 때가 태반이고, 어떻게든 이유를 알음알음 찾아내서 달래줘보아도 노력한 만큼 고쳐지지도 않는다. 때문에 엄마는 언제나 열심히 노력하되, 내 노력이 헛수고가 되어도 꿋꿋이 버텨야 한다는 각오를 하고 단단하게 살아야 한다.
엄마가 된 나는 내 아기를 책임지기 위해 단단한 척을 하고 살아간다.
덕순이가 유난히 밥을 안 먹고 보채는 날에도 그다음 끼니를 준비하고, 잠을 깊게 못 자고 여러 번 깨는 날에도 늘 함께 일어나 다시 잠이 들 때까지 안아주고 달래준다. 몸과 마음이 몹시 지친 날엔힘들다고 사표를 쓰고 싶지만 내가 사표를 쓰면 우리 아기를 나와 같은 정성으로 맡아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다시 정신줄을 부여잡고 살아간다.
그렇다 해도, 아무리 단단해 보여도 두부는 두부다.겉은 바삭해 보일지라도 젓가락으로 찌르면 푹 들어갈 것이다. 내가 그렇다.
씩씩하게 지내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별 것도 아닌 일에 모래성이 파도에 휩쓸리듯 와르르 무너진다. 이제껏 내 마음이 한 생명을 책임지는 중압감과 무게를 견뎌온 만큼 단단했던 것이 아니라, 그냥 몸과 마음이 매일매일 조금씩 무너지는 줄 알면서도 고달픈 현실을 외면했던 것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것만 같았다.
나는 아기를 낳은 뒤부터 뼈마디가 무척 저리고 아팠다.
손목 발목 안 아픈 곳이 없었는데 그중 무릎이 특히 아팠다. 아기를 낳기 전에는 운동한답시고 스쿼트만 주야장천 했던 적도 있었는데 덕순이를 낳은 뒤부터 그냥 앉았다 일어나는 것조차 무릎에 통증이 느껴졌다. 조금 과장해서 이러다 이 나이에 인공 관절을 해야 하나 걱정도 들었었다.
참다못해 정형외과를 가봐야지 하고 생각은 했었는데, 아기를 보면서 병원에 가는 게 참 쉽지가 않았다. 혼자 육아를 전담하는 평일에는 엄두도 못 내고 그나마 토요일 오전쯤이나 가야지 생각은 했는데, 아기를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하면 오전도 순식간에 지나가버렸다. 그렇게 한 번 두 번 미루다 보니 어느새 병원 간다는 걸 깜빡 잊고 살았다.
그러다 펑펑 울었던 그날, 아팠던 것조차 잊고 살았던 그 무릎을 찧었다.
아파서 울음이 나왔고, 아픈 날 위해 병원 갈 시간조차 낼 수 없는 지금 이 상황이 너무 막막해서 울음이 나왔다.
예전엔 그보다 더 심하게 다쳤을 때에도 울진 않았는데, 더 씩씩해야 할 엄마가 되어버린 나는 그렇게 가끔 사소한 일에도 모래성이 파도에 휩쓸리듯 감정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고 과민반응할 때가 몇 번 있었다.
혼자 무릎을 찧어서 울고, 얼려둔 밥이 딱딱하게 굳어 먹을 것이 없어 울고, 어질러진 장난감을 치우다 울어보았다. 남들이 보았을 땐 우울증을 심하게 겪는 사람처럼 보이겠다 싶었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무렇지 않게 살다가 사소한 일에 불현듯 울음이 터지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많은 엄마들이 그렇게 지친 몸과 마음을 부여잡고 살고 있었다.
비슷한 시기 아기를 낳은 내 친구는 그냥 거실을 멍하니 바라보다 울었다고 했다. 또 어느 엄마는 아기를 씻기고 나오다가 울었다고 했다. 그들은 모두 나처럼 사소한 일을 겪었겠지만, 마치 풀 숲에 숨겨진 작은 꼬리를 잡아당겼는데 커다란 호랑이가 끌려 나오는 것처럼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쏟아져 나왔을 것이다.
비슷한 시련을 겪은 사람들은 공감으로 끈끈하게 묶여 서로를 더 잘 이해하게 된다.
혼자 무릎을 찧고 펑펑 울었던 나는 거실을 멍하니 바라보다 울었다는 친구의 마음을 누구보다 더 잘 알게 되었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어서 마음이 통하는 친구가 생긴다는 게 참 어려운 일인데, 감사하게도 아기를 낳고 비슷한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동병상련의 처지인 친구들이 참 많이 생겼다.
예쁘고 건강한 아기를 선물 받아 하루하루 감사해도 모자라지만, 욕심이 많은 나는 하나를 더 바라본다.
육아의 고충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이 글을 읽고 조금이라도 엄마의 마음을 이해해주기를. 그래서 어느 날 사소한 일에도 갑자기 감정이 폭발해버리는 엄마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헤아려주기를.
"걔 있잖아. 아기 낳고 되게 예민해졌어. 좀 거리를 둬야 할 것 같아."
아기를 낳고 나면 자연스럽게 아기를 아직 낳지 않은 친구들과 공감대가 줄어들면서 멀어지는 것을 느끼곤 한다. 누군가는 나를 두고 이렇게도 말할 것 같아 내심 걱정이 들었다.
그 조바심에 나는 이렇게나마 엄마들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공감과 이해를 갈구한다.서로를 이해하기 팍팍한 세상이지만 그래도 이해를 부탁해본다. 그렇게 마음과 마음이 닿는다면 고달픈 육아를 치르는 엄마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