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소년 표류기와 생존왕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방영됐던 ‘Man vs Wild’와 ‘Worst-case scenario’에서 ‘생존왕’ 베어그릴스가 오지를 무대로 펼치는 모험은 마치 로빈슨 크루소를 실시간으로 보는 듯한 긴장감과 흥미를 준다. 무엇보다 시청자의 눈길을 끄는 장면은 먹을 것을 구하기 힘든 환경에서 그가 선보이는 온갖 엽기적인 먹방이일 것이다. 생존왕은 사자가 먹다 남긴 얼룩말 시체를 뜯어 먹고 물뱀의 머리를 잘라 산 채로 먹는가 하면, 거미와 온갖 벌레들도 ‘귀중한 단백질원’이라며 태연하게 입에 넣는다.
그에 비하면 쥘 베른의 1888년작 소설 ‘15소년표류기’에 등장하는 오지에서의 먹방은 훨씬 정상적이고 호화스럽기까지 하다. 아무래도 등장인물들이 부잣집에서 자란 청소년이라는 점을 감안한 듯 하며, 이 경우는 기본 식량을 갖춘 상태에서 모험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생존왕과 차이가 있다.
원주민들은 다닐 수 없는 뉴질랜드의 백인 학교인 체어맨에 재학 중인 14명의 소년들이 항해를 계획하는 데서 소설은 시작된다. 이들은 방학을 맞아 친구 아버지가 빌려 준 요트를 타고 남태평양 연안을 느긋하게 항해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출발 전날, 선원들이 소년들을 남겨둔 채 술을 마시러 간 사이에 웬일인지 배를 묶은 밧줄이 풀려 버리고, 폭풍까지 만나 배는 어느 낯선 섬에 좌초한다.
소년들 중 가장 나이가 많고 꼼꼼한 성격의 고든은 건빵과 통조림, 햄, 비스킷, 콘비프와 와인, 맥주, 브랜디, 위스키, 진 등의 물품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식량 자급 계획을 세운다. 이 부분에서 ‘청소년들이 무슨 술을?’ 할 독자들이 있을 텐데 당시 항해하는 선원들에게 술은 필수품에 가까웠다. 통이나 병에 넣어 저장한 물은 가만히 두면 물이끼가 끼거나 썩기 쉬운데 약간의 술을 타면 물이 변질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덕분에 선원들은 항상 조금씩 취한 상태로 지냈다고 한다.
지금은 군용식량으로 더 친숙한 건빵은 항해 중 장기간 보관할 수 있는 식량이었는데, 문제는 보관 중 바구미가 낀다는 것이었다. 선원들은 ‘에라 모르겠다’며 그냥 먹거나 물에 담가 기어 나오는 바구미를 제거하고 먹었다고 한다. 뱃사람들이 성질 사납고 거칠다는 속설은 이렇게 열악한 식량 사정에서 나온 것은 아닌가 싶다.
어쨌든 부족한 식량을 보충하기 위해 소년들은 사냥과 채집에 나서고, 낯선 식재료를 그럴듯한 요리로 바꿔 놓는 이는 소년들 중 유일한 흑인이자 견습 선원인 모코이다. 모코는 소년이 주워 온 홍합이나 대합을 맛있게 양념해 내놓는가 하면, 이름도 생소한 섬 안의 동물들을 재료 삼아 근사한 만찬을 차려낸다.
메추라기에 능에, 명메기, 숲비둘기, 남극기러기 같은 새를 비롯해 설치류 동물인 투코투코, 마라, 피치(아르마딜로의 일종), 페카리, 과슐리(사슴과 비슷한 동물) 같은 이름들을 읽고 있으면 마치 ‘정글의 법칙’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집채만큼 큰 바다거북도 ‘귀중한 단백질원’으로 활용된다. 뿐만 아니라 영양과 비슷한 비쿠냐의 젖, 온갖 새들의 알, 호수와 바다에서 잡은 송어와 강꼬치고기, 연어, 대구 등도 한창 식욕이 왕성한 소년들의 식욕을 채워주는 데 부족함이 없다.
심지어 소년들은 섬 구석구석을 탐험하며 각종 기호품까지 찾아낸다! 남미 인디오들이 좋아한다는 트롤카와 알가로브라는 열매를 이용해 술을 담그고, 너도밤나무 껍질을 계피 비슷한 향신료로 쓴다. 자작나무에서 당분을 보충하다(‘자일리톨’의 원료인 그 당분을 말한다) 사탕단풍나무에서 시럽을 얻고, 페르네티아라는 나무의 잎을 따서 차로 마신다. 아무래도 소년들 대다수가 영국인이다보니 차 없이는 못 사는 점을 반영한 듯 하다. 그러고 보니 생존왕도 식량만큼 열심히 찾아다니는 것이 차를 대신할 나뭇잎이다.
마지막 대미를 장식하는 식량자원은 ‘암소나무’라고 불리는 갈락텐드론이라는 나무인데, 수액이 우유와 흡사하다. 실제로 남미 원주민들이 즐겨 마신다는 이 수액은 우유보다 영양가가 높아 걸쭉하고 진한 느낌이라고 한다. 수액을 굳히면 맛있는 치즈 같은 상태로 변하며, 초 등을 만드는 왁스로 활용할 수도 있다. 이 나무의 존재가 세계적으로 알려졌다면 채식주의자들도 가책(?) 없이 유제품을 먹을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또 섬에서 첫 번째로 맞는 크리스마스에 모코는 솜씨를 발휘해 호화로운 파티 음식을 준비한다. 만찬 테이블에는 아구티 찜과 메추라기 레드와인 스튜, 향채를 넣고 구운 토끼고기, 능에구이, 채소 통조림, 코린트산 건포도와 브랜디에 담근 알가로브 열매를 넣은 푸딩, 보르도산 와인에 셰리주, 홍차와 커피까지 등장한다. 이쯤 되면 낯선 섬에서의 모험이라는 작품의 배경을 깜빡 잊을 정도이다.
다만 야생 샐러리를 제외하고는 신선한 채소가 부족해 통조림으로 대신한다는 대목이 나온다. 만약 이들이 아시아에서는 들풀을 나물로 이용하고, 해초를 식용한다는 것을 알았으면 어땠을까. 확실히 이 대목에서는 ‘15소년 표류기’가 철저히 백인 위주의 시각으로 쓰여졌음을, 그리고 당시의 서구인들이 아시아 문화에 있어서는 상당히 무지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유일한 흑인 캐릭터이자 섬의 셰프인 모코는 다른 백인 소년들에게 존대를 하고, 섬의 대통령을 뽑을 때는 투표권조차 얻지 못한다. 무인도라는 환경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의 호화로운 식사는 오롯이 모코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종차별 앞에 그의 수고는 무용지물로 취급되고 만다. 19세기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니 어쩔 수 없는 면은 있지만...
그리고 이 작품을 그저 순수한 모험 소설로만 읽기에는 여러 모로 찜찜한 구석이 많다. 소년들은 섬의 곳곳에 자기네 나라 지명을 따서 붙인다. 오늘날 남태평양의 여러 섬들이 생뚱맞게 ‘크리스마스 섬’, ‘빅토리아 섬’ 같은 서양식 이름을 갖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아프리카의 국경이 자로 잰 듯 반듯한 모양을 갖고 있는 이유는 또 뭘까. 따지고 보면 이들은 자신들의 아버지인 백인 제국주의자들이 탐험과 개척이라는 이름으로 저지른 만행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셈이다.
또 작품의 후반부에서 이들은 악당들과 마주치고, 적의 가슴에 탄환을 꽂아 넣는 일을 주저하지 않는다. 물론 생명을 위협당하는 상황이었다고는 하지만 엄연한 살인인 것이다. 오히려 어른이 아닌 아이들이었기에 적을 죽이는 데 가책과 망설임을 덜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윌리엄 골딩의 소설 ‘파리대왕’과 비교해서 읽는다면 ‘15소년 표류기’의 소년들이 결코 선하고 순수하지만은 않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그밖에도 소수의 아이들만이 모여 사는 집단에서 굳이 ‘대통령’을 뽑으려 하는 점, 그리고 프랑스인인 브리앙과 영국인 도니펀의 갈등을 현실 사회의 기준으로 보면 뭔가 미묘함이 느껴진다. 작가인 베른은 인간, 그중에서도 남성들은 상호 수평적이기보다 수직적인 인간관계에 익숙하며 권력과 서열을 중시하는 본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소년들의 권력구도와 갈등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대영제국’으로 대표되는 서구 열강의 식민지 확장은 2차 대전의 종료와 함께 사라졌다. 그리고 유럽인들이 19~20세기에 전 세계를 누비며 저지른 각종 만행들은 제3세계가 성장하면서 호된 비판을 받고 있다. 베어그릴스의 TV속 모험에 영국인들이 열광하는 것은 잃어버린 정복과 탐험의 시대에 대한 향수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오늘날 장르문학에서 ‘15소년 표류기’가 차지하는 위치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