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미국 남부 음식문화를 볼 수 있는 먹방소설
마거릿 미첼의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는 파티에 가기 전 폭식 방지(!)를 위해 아침식사를 하는 스칼렛
의 모습이 나온다. 메밀가루로 만든, 시럽이 뚝뚝 떨어지는 팬케익과 그레이비 속에서 헤엄치는 햄 한조각, 버터를 바르고 구운 큼직한 고구마가 그날의 식단이었다. 다른 메뉴는 그닥 신기하지 않은데 19세기 미국에서 고구마를 먹었다? 서양에선 고구마를 먹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던 나는 혹시 오역이 아닌가 부지런히 사전을 찾고 원서를 읽어보기도 했다.(예나 지금이나 쓸데없는 데 에너지 빼는 버릇이...ㅠㅠ)
'미국 고구마'에 대한 의문이 풀린 것은 대학때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하고 나서이다. 우리나라 고구마처럼 포슬포슬하지는 않은, 진한 주황색에다 훨씬 촉촉한 고구마에 마시멜로를 얹어 구운 디저트를 한 식당에서 맛보게 된 것이다. 뒤늦게 나는 그것이 고구마와 비슷한 마과 식물인 '얌'이라는 것을 알았다. 물컹한 식감이 조금 낯설기는 했지만 개인적으로 퍽퍽한 밤고구마를 좋아하지 않다보니 나름 맛있게 먹었었다. 이 요리는 미국에서 추수감사절에 주로 해먹는 메뉴라는 것도 그때 알게 됐다.
남북전쟁 전후 미국 남부 상류층의 몰락상을 그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전쟁 소설이면서 변화하는 사회상을 담은 소설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당시 사람들의 생활을 들여다보는 풍속화 같은 재미가 있는 작품이다. 마치 고 최명희의 소설 '혼불'이 구한말 남도 양반가의 모습을 섬세하게 그려낸 것처럼 말이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19세기 미국 남부는 농업이 발달하다 보니 아무래도 북부에 비해 식량 사정이 훨씬 나았으며 음식의 종류도 더 다양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엄격한 청교도적 분위기가 상대적으로 강했던 북부보다 식도락에 대한 인식도 더 긍정적이었을 것이다.
이 작품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음식은 탈레턴 쌍둥이 형제가 마시는 박하수이며, 그 다음이 칵테일의 일종인 민트 줄렙이다. 내가 처음으로 읽었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번역본은 아마도 70년대?쯤의 오래된 것이다보니 "위스키에 설탕과 박하의 새싹 다진 것"이라고만 묘사돼 있을 뿐 줄렙이라는 단어는 직접 등장하지 않았다. 어쨌든 뜨거운 햇살이 강한 남부에서 박하를 넣은 줄렙은 갈증을 씻어주는 데 더없이 좋은 음료였다고.
트웨브 오크스에서의 바베큐 파티 때는 흑인들의 소울푸드도 잠시 등장한다. 고구마와 옥수수빵, 흑인들이 즐겨 먹는 돼지 내장...이라고 번역돼 있는데 여기서 옥수수빵은 콘밀로 만든 Hoecake라는 것이며 돼지 내장은 소장인 곱창으로 Chitterling이라고 한다.
팬케이크에 가까운 Hoecake는 얇은 옥수수가루 반죽을 쟁기에 얹어 구운 것이다. 제대로 요리할 시간이 없었을 흑인 노예들이 간단하게 끼니를 때우기 위해 생각해낸 음식이다. 또 백인들이 먹지 않는 내장에다 이들은 당근과 샐러리 같은 향미 야채와 허브를 넣고 푹 삶아 잡내를 없앴다. 아니면 그냥 통째로 튀겨 먹기도 했다. 안 그래도 기름진 곱창을 튀기기까지 했으니, 칼로리는...상상에 맡긴다....
원래도 체면 안 차리고 잘 먹는 스칼렛은 레트와의 신혼여행지인 뉴올리언스에서 말 그대로 맛의 신세계를 경험한다. 그녀가 고급 레스토랑에서 먹어치우는 메뉴들은 검보, 크리올식 새우요리, 비둘기 와인찜, 굴 파이, 버섯과 송아지 흉선(Sweetbreath), 칠면조 간, 라임을 얹은 생선 빠삐요뜨(종이말이 구이) 등이다.
검보는 스튜의 일종으로 새우나 닭고기에 양파, 샐러리, 고추, 오크라, 토마토에 쌀을 넣어 푹 끓인다. 쌀이 들어가는데다 매콤한 케이준 스파이스까지 들어가 걸쭉한 찌개를 먹는 느낌이 든다. 국물을 걸죽하게 만드는 오크라는 아프리카 원산의 풋고추와 비슷하게 생긴 채소로, 아프리카 말로 검보라고 부른다. 썰어 보면 작고 노란 씨앗이 들어 있는데 끈적한 질감이 처음 맛보는 사람들에겐 다소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한때 미국 남부 가정식을 전문으로 하는 '샤이바나'에서 팔기도 했는데 어느 순간 은근슬쩍 사라졌다...
크리올 새우는 피망과 토마토, 양파, 샐러리에 새우를 넣고 볶다가 칠리와 카이옌 페퍼로 맵게 양념한 요리를 말한다. 뉴올리언스 요리에 이렇게 매운 양념이 들어가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1620년경, 캐나다 노바스코샤의 아카디아에 살던 프랑스인들이 1755년 영국에 의해 루이지애나로 강제 이주해 오게 됐다. 이곳에서 좋은 고기나 해산물을 찾기가 어려웠던 사람들은 강한 양념을 써서 맛을 내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식도락을 즐기는 프랑스인의 후예이다 보니 그런 것인지, 프랑스 요리의 영향을 상당히 받은 듯한 이곳의 요리는 오늘날 미국 내에서도 고급 대접을 받고 있다. 뉴올리언스에서 대부분의 음식에 들어가는 케이준 스파이스는 집집마다 레시피가 다르다고 하는데 기본적으로 칠리 파우더, 카이옌 페퍼, 후추, 마늘, 생강 등 매운 양념이 주 재료이다.
굴 파이는 파삭한 파이 크러스트 안에 굴과 샐러리, 양파, 당근 등을 넣은 크림소스를 채워 구운 요리이다. 스윗브레스란 프랑스 요리에 주로 쓰이는 식재료로 어린 송아지의 흉선과 위 옆에 있는 췌장을 가리킨다. 매끄럽고 부드러운 촉감을 가지고 있으며 버터를 발라 구우면 풍성한 육즙 맛이 일품이다. 빠삐요트란 생선이나 고기에 소금 후추와 허브 등으로 양념을 한 다음 유산지로 감싸 오븐에 익힌 것인데 밀봉한 종이가 찜기 역할을 하며 종이를 찢는 순간 향이 확 피어오른다. (어릴때 읽은 번역본에서는 라임을 '석회(Lime)'로 오역해 어리둥절해진 적도 있다. )
한때 미국에는 맛있는 음식이 별로 없다는 인식이 있었지만 오랫동안 다양한 인종이 모여서 살아온 덕에 그들 나름의 다채로운 식문화가 발달해 왔다. 그리고 내용이 워낙 방대하다 보니 그다지 눈에 띄지는 않으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19세기 미국의 음식문화를 담아낸 '먹방소설'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 참고로 본토의 것과상당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K**의 비스켓과 프라이드 치킨, 파***의 '케이준~'이름이 붙은 메뉴에는 미국 남부 향토음식의 흔적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