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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사람은 살아진다

'보고 싶다'는 말은 우리를 연결해 줘

by 김지만

이제까지 나는 쉼 없이 나아가는 글을 썼다. '나는 할 수 있다.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주변의 유혹을 밀어내며, 10대 시절 하지 못한 것들을 하나씩 채워갔다. 나만의 색깔을 찾았고, 아래보다는 끝없이 올라가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흐름은, 2017년 가을 무렵 일시정지 되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이다.


할머니는 부산에서 오랫동안 요양하셨다. 젊은 시절의 지병이 끝내 몸을 붙잡아 놓았고,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의 건강한 모습은 2007년 무렵이다. 9살 때 할머니와 함께 부산 시내 곳곳을 여행했었고, 그늘 아래에서 김밥을 먹었다. 우리 삼 남매를 보면서 "착하다, 착하다"는 말을 자주 하셨다. 그때 찍은 사진 한 장이, 훗날 할머니의 영정사진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할머니를 뵌 건 2016년 겨울이었다. 내 얼굴도, 아버지 얼굴도 알아보지 못하셨다.

그리고 1년 후, 아버지께서 평소처럼 할머니를 보러 부산 요양병원에 다녀오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원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이었다. 아버지는 그날 모든 일정을 멈추고 다시 부산으로 향했다. 그리고 영혼이 떠난 할머니의 몸을 모시고 제주도로 돌아오셨다. 이미 세상에 없는 사람도 비행기의 탑승객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장례식장 안치실은 실내였지만, 삼베 상복 사이로 스미는 바람이 꽤 차게 느껴졌다. 분명 할머니인데, 할머니 같지 않은 사람이 딱딱하고 차가운 철제 테이블 위에 누워계셨다. 장의사가 할머니께 마지막 인사를 전하라고 하셨다. "할머니 그동안 수고 많으셨고, 좋은 곳에 가셔서 편히 쉬세요.."라고 나지막이 이야기했던 것 같다. 가족 모두가 할머니께 할 말씀을 전하고, 장의사를 포함한 직원들은 할머니의 몸을 천천히 붕대로 감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유리창 너머로 지켜보던 아버지는 그동안 꾹 눌러왔던 감정을 터뜨렸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아버지가 흐느끼는 모습을 봤다. 세상이 잠시 조용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음속에 무언가가 떨어져 가는 느낌이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울지 않았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우는 모습을 보며, 이상하게도 '나는 울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명제를 당연하게 여겨왔지만, 장례식장에서 영혼 없는 고인의 몸을 보는 것, 한 때 나와 대화했던 분의 몸과 영혼이 한 줌의 재로 변해가는 과정을 보는 것은, 직접 경험해 보고 나서야 그 절절한 느낌을 알았다.


아버지는 다시 일터로 나가셨고, 우리 가족은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왔다. 부모님은 일을 하시고, 나와 동생은 학교에 갔다. 모든 것이 예전과 같았지만, 내 안에서는 무엇인가 빠져나간 느낌이 들었다. 모든 일에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단지 할머니가 보고 싶어서라기보다는, 나를 지탱하는 한 부분이 하나 빠진 감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뻥 뚫린 마음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이제 세상에 없는 사람은 어떻게 그리워하고, 마음에 담아두어야 하는 건지, 그건 학교에서도 배운 적이 없었다


의욕이 줄어들었다. 수업에 집중하기 어렵고, 과제도 밀렸다. 친구들과 일부러 거리를 두고, 집에 오면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휴대폰으로 재밌는 영상을 보다가 영상이 끝나고 꺼진 화면을 보면 갑자기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러다 보니 내가 하는 모든 경험들이 의미 없게 느껴졌다. '어차피 사람은 결국 다 죽는데, 왜 이렇게 열심히 살아야 하지? 죽으면 다 끝인데, 뭘 위해 노력하고 경험을 쌓아야 하지? 열심히 살다가 죽어도 돌아갈 때는 내 몸 하나만 들고 가는 거잖아. 죽으면 다 끝이네. 진짜 허무하다.'라는 생각들이 내 머리를 지배했다.


끝없이 위로 향하고 싶은 삶에서 허망함이 찾아왔다. 삶에 대한 동기가 흐려졌다. 식단관리도 중단했고, 먹고 싶은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었다. 4개월 만에 체중이 다이어트 이전 몸무게로 돌아왔다. 이전 같았으면 초조했겠지만, 그때는 어떤 감정도 느끼기 어려웠다. 그냥 다 무의미하게만 느껴졌다. 할머니 돌아가신 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인데,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걸까?' 내 안의 또 다른 목소리는 나를 타박했다.



'이 정도 일로 이렇게까지 힘들어하면 되겠니? 정신 차려' 그럴수록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졌다. 당장 해야 할 일이 많은데, 마음은 정리를 원했다. 애도하는 법을 몰랐다. '그래도 괜찮다'라고 얘기해 주는 목소리를 원했다. 가족들에게는 애써 당찬 큰 딸이 되고 싶었다. 그저 '산 사람이 이미 죽은 사람을 그리워하는 건 당연한 거야. 의욕이 없어도 괜찮아. 그런 감정을 가져도 괜찮아.'라고 스스로 대뇌였다. 마음이 시도 때도 없이 위아래로 왔다 갔다 하길래, 마음의 중심을 찾아준다는 명상, 요가, 마음 챙김 등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유튜브에서 가이드를 따라 요가를 해보고, 눈을 감고 명상을 해보았다. 익숙하지 않았고, 자세도 엉성했지만, 그 시간이 주는 정적은 도움이 됐다.

생각해 보면 나는 그동안 마음보다 머리가 시키는 대로 살아왔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에도, 그 슬픔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한 채 그냥 덮어두고 합리적으로 생각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고, 결국 다양한 모습으로 내 안에 머물렀다.



아마 내가 후유증이 길게 간 이유는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에서 오는 슬픔을 덮어놓고 모른 척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후로, 나는 억눌렀던 감정을 가만히 응시하고, 드러내놓고 표현하는 연습을 했다. 슬프면 슬프다고, 기쁘면 기쁘다고, 화나면 화났다고 내 마음을 그대로 말해보려 했다. 처음엔 어색했다. 5살 아이가 감정을 배우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억눌렀던 감정을 드러내는 연습을 했다.



하루에 한두 번, '지금 나는 어떤 기분이지' 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그 작은 질문이 감정을 부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습'이 되었다.



그전엔 이렇게 생각했다. 열심히 살고, 좋은 사람이 되고, 더 나은 내가 되면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 줄 거라고. 더 많은 기회를 만나고, 인정받게 될 거라고. 하지만 후유증을 겪으며 깨달았다. 나는 본래 그런 이유로만 열심히 살아온 건 아니었다. 사실은 10대 시절의 나를 바꾸고 싶음과 동시에, 그 시절의 나 역시 받아들이고 싶었던 것 같다. 나는 여전히 조용한 걸 좋아하고, 가끔은 누워 있는 게 더 편하고, 열심히 살기보다는 '그냥 살아있는 걸로 족한' 마음도 있다. 그 마음들을 억지로 밀어내지 않고, 욕구끼리 서로 이야기하게 해 보았다.

어떤 날은 움직이고, 어떤 날은 멈췄다. 욕망과 안정 사이에서 시소를 타듯 서서히 두 가지 욕구를 인정하며 살아가는 중심이 만들어졌다.


어바웃 타임의 마지막 대사는 이때의 나를 위로해 주었다.

'우리는 모두 일상 속에서 시간 여행을 하고 있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이 훌륭한 여행을 즐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거야. 난 그저 하루하루 이 날을 즐기기 위해 시간 여행을 한 것처럼 오늘이 특별하면서도 평범한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려고 노력할 뿐이야.

'We are all travelling through time together, everyday of our lives. All we can do is do our best to relish this remarkable ride. I just try to live every day as if I've deliberately come back to this one day to enjoy it, as if it was the full final day of my extraordinary, ordinary life.'


삶의 기준이 조금 달라졌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죽기 전 여한이 없을까?'


그 질문이 나를 다시 움직이게 했다. 하지만 그건 무조건 열심히 살자는 의미가 아니었다.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 있고 싶고, 때로는 바쁘게 하루를 채우고 싶다. 그 둘 다 나다.



유명해지기 위해서, 남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 지금 이걸 원하고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것. 그 마음을 스스로 받아들여주는 순간, 태어난 것 자체로 소중한 사람이 된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도 좋지만, 죽기 전 세상에 존재할 때 '얼마나 재밌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지 알고, 감사하며 살아가도 충분한 하루'라고 되뇌었다.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해 20대 초반의 많은 흑역사를 그 시기쯤에 남겼다.

그래도 배웠던 것은 나를 세상에 드러내는 것보다 내 몸의 욕구를 알고 건강하게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이었다.


시간이 지나 작년에 외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셨다. 과거와 달리 나는 펑펑 울었고, 지금은 종종 어머니께 할머니가 보고 싶다고 이야기를 한다. 이제 슬프고, 보고 싶다는 감정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냥 생각나면 말을 한다. '보고 싶다.'는 말 한마디로 할머니에 대한 내 감정이 살아나고 우리는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도 그 사람과의 추억을 기억하고 슬퍼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 감정을 억누르지 말고 가만히 지켜보자. 보고 싶은 할머니, 할머니! 편안하게 계세요. 저도 여기서 편안하고 재밌게 놀고 있을게요! 보고 싶어요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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