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 각자의 시간 감각

약속 시간이라는 습관

by Sam의 기억 궁전


일본에 거주한 지 어느덧 8년.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체감한 문화 차이 중 하나가 ‘시간’이었다.

한국에서야 시간은 비교적 유연하게 흐른다고 생각해왔는데, 일본은 달랐다.

‘시간을 어떻게 대하는가’라는 문제.

단순히 시계를 보는 습관을 넘어서서 인간관계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기준처럼 느껴졌다.




한국에서는 “조금 늦을 수도 있어요”라는 말이 통상적인 안전장치처럼 쓰인다.

지하철 환승이 꼬이거나, 엘리베이터가 안 오거나, 아메리카노 한 잔을 즐기다 약간 늦어도.

“죄송해요, 조금 늦었어요”라는 말 한마디면 대부분의 상황이 무리 없이 넘어간다.

정각에 도착하는 것이 예의라는 전제는 있지만, 그것이 매번 의무처럼 강하게 작동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이 ‘조금 늦는다’는 말이 굉장히 무겁게 들린다.

도쿄에서 처음 지인을 만나는 날, 약속 시간보다 오 분 늦은 적이 있었다.

메시지를 보냈고, 상대는 “괜찮아요”라고 답했지만, 미묘한 공기의 결이 달라진 걸 느낄 수 있었다. 그 뒤로는 습관처럼 항상 10분 전에는 도착하게 됐다.

일본에서 ‘정각’이 이미 조금 늦은 것일 수도 있으니까.




지금 사는 일본. 동네 근처의 커피숍은 오전 열 시에 문을 연다.

나는 주말 아침 산책 겸 커피를 사러 가곤 하는데, 2분 전쯤 되면 벌써 두세 명이 줄을 서 있다.

그들은 조용히, 아무 말 없이 시계만 본다.

정확히 열 시가 되는 순간, 문이 열리고, 아무도 성급하게 움직이지 않는다. 주인도, 손님도.

그 단정한 질서 속에서 일본 사회가 시간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반면, 한국에서의 기억은 다르다.

약속 장소에 도착해 “나 지금 도착했어”라고 연락을 보내면

“아, 나도 거의 다 왔어”라는 답이 오곤 했다.

‘거의’는 실제로는 오 분에서 십오 분의 범위 안에 있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나도 이제 막 도착했어’라는 말이 서로 간의 암묵적인 여유로 정착된다.

그 여유는 유연하고, 인간적이면서도 때때로 예측하기 어렵다.




비즈니스 환경도 예외는 아니다.

일본에서는 회의 시간이 오후 세 시라면,

실제 회의실 앞에는 이십 분 전쯤부터 사람이 모여 있는 경우도 많다.

다들 조용히 자리에 앉아, 회의 자료를 미리 훑어보거나 노트북을 펼친다.

'준비가 되어 있다'라는 태도를 사전에 보여주는 것.

일의 시작은 시간보다 앞선 곳에서 이미 시작된다는 암묵적인 룰이다.


반면, 한국의 비즈니스 미팅은 상대적으로 ‘시간 안에 들어오면 괜찮다’는 분위기가 있다.

회의 시작 시간 오 분 전에 도착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고.

때로는 약간의 지각도 미리 양해를 구하면 실무적인 문제로 번지지 않는다.

물론 그 유연성에는 맥락이 따른다.

상대가 누구인지, 미팅의 성격이 어떤지에 따라 기준은 달라지곤 한다.

일본이 전반적으로 정형화된 시간 감각을 갖고 있다면, 한국은 관계성과 상황에 따른 '시차'가 있다.




결국, 내가 느끼는 일본의 시간 약속은 ‘맞춘다’기보다 ‘준비한다’에 가깝다.

정각이 되기 전, 이미 시작될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


한국인인 나는 때때로 한국식의 여유가 그리워질 때도 있다.

약속 시간보다 늦게 도착한 친구가 미안하다고 웃으며 말할 때, 그 웃음 하나로 불편함이 풀어지던 경험들. 거기엔 단순한 배려 이상의 ‘정’이 있었다.

물론 지금은 두 나라의 감각 사이 어딘가에 서 있다.

일본에서는 여전히 십 분 일찍 움직이고, 한국에 가면 그 여유로운 흐름 속에 자연스레 물든다.



내게 중요한 건 시간 자체보다, 그 시간 안에 담긴 서로에 대한 태도와 신호다.

시간을 맞춘다는 것은 상대에게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하는 방식이 아닐까 하고.

그리고 때로는, 조금 늦더라도 ‘괜찮아요, 천천히 오세요’라고 말할 수 있는 내가 되기를 바란다.



거기에 시간보다 더 넓은 공간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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