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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EK Miyoung Jan 18. 2024

지난여름, 산에게

병원의 하루 + 일기를 쓰다.

1. 하루 일과

병원의 아침은 이르게 시작됐다. 

새벽 5시. 병실 전체 불이 와다다닥 켜지고 간호사들은 의료 장비가 담긴 수레를 달그락 거리며 병실에 입장한다. 나는 아직 잠이 덜 깨어 젖은 눈을 끔뻑거리고 있는 와중에 일사불란하게 혈압과 체온을 체크당한다. 3일에 한번 감염 수치를 확인하기 위해 채혈을 해야 했고, 4일에 한번 수액 라인을 바꾸기 위해 다시 내 건강한 혈관을 찾아 바늘을 바꿔 달았다. 팔에 굵은 바늘이 꽂히는 순간에는 비몽사몽 하던 눈도 급 떠졌다. 바늘이 무서운 것은 아니지만 바늘을 꽂는 통증은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순간을 각인하는데 도움이 됐다. 이미 여러 개의 주사자국으로 양팔은 멍투성이었다. 사진으로 내 팔을 본 남편은 약쟁이 같다며 짓궂게 놀리곤 했다. 간혹 산모들 중 주삿바늘을 꽂을만한 혈관을 찾지 못해 고생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면 세상 침착한 간호사 선생님도 땀을 흘리곤 했다. 가까이서 들려오는 환자들의 고통 어린 소리는 언제 들어도 마음이 어려워졌다. 직접 겪어보지는 않았지만 수액이 타고 흐르는 혈관 라인을 따라 혈관통이 심한 임신부도 있었다. 그 역시 매우 고통스럽다고 했다. 체질적으로 또는 임신으로 체질이 변하면서 혈관이 약해져 낮은 압력의 수액으로도 혈관이 터지는 경우도 왕왕 있다고 했다. 그 모든 것이 굵은 바늘의 주사를 맞는 일보다 겁이 났다. 나는 주사 라인을 교체할 때마다 이번에 주삿바늘을 뺀 혈관이 잘 아물어서 다음번 라인을 교체할 때도 별 탈 없이 주삿바늘을 꽂을 수 있길 바랐다. 아직 반은 눈을 감은 채로 누워있다 보면 6시~6 반 사이에 양수량 체크를 위해 초음파를 보았다. 나는 잠깐 다시 잠에 들었다가도 초음파실로 오라는 간호사 선생님의 호출을 듣고 헐레벌떡 깨어나곤 했다. 

 초음파실은 병실에서 스무 걸음도 채 안 되는 맞은편 병실에 위치해 있었다. 매일 체크했지만 양수량은 한결같이 적었다. 나와 같이 양막에 문제가 생기지 않고서야 이렇게 매일 초음파를 보는 산모는 없었다. 그탓에 매일 아침, 초음파 모니터로 아이를 만나는 나를 부러워하는 산모도 있었다. 나를 부러워하기도 하다니, 아이러니했다. 나는 검은 화면 속의 너를 유심히 바라봤다. 좁은 자궁 안에서 잔뜩 몸을 웅크린 채 자라나고 있는 네 모습이 반가우면서도 미안했다. 너는 언제쯤 팔다리를 쭉쭉 뻗어도 남을 넉넉한 공간에서 편안하게 자라날 수 있을까. 이런 내 못난 자궁이, 야속하게 빵꾸가 난 내 양막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 없었다. 양수가 적으면 초음파로 아이 모습이 잘 잡히지 않는다. 초음파 화면은 흑백이다. 양수가 검게 나오고, 보통 태아의 모습은 볼륨감이 느껴지는 하얀색으로 비친다. 그렇기 때문에 양수가 적으면 흑백의 대비가 적으니 아이의 윤곽이 잘 잡히지 않는다. 그렇게 너는 분명 거기에 있지만, 또렷하게 보이지 않았다. 초음파를 자주 보면서도 출산할 때까지 너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 너는 그때부터 나에게 항상 그저 궁금한, 그런 아이였다.

 양수 검사를 받고 병상으로 돌아오면 (지나치게 맛없는) 병원 아침밥이 나왔다. 입원 기간이 길어지면서 침대 주변으로 하나 짐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맛없는 밥을 대처할만한 간식과 비상식량이었다. 밥이 형편없을라치면 나는 김과 참치를 비장하게 꺼내 들곤 했다. 오전 8시 30분~9시 사이에 담당 교수님의 회진이 있었다. 식사 시간과 회진 시간 사이에 막간의 틈이 있고, 상황이 괜찮으면 시간을 샤워 시간으로 삼았다. 말끔한 모습으로 교수님을 뵙고 나면 오전 대부분의 일정이 끝이 난다. 10시 20분 보호자들의 짧은 면회 시간이 지나갈 때까지, 나는 다시 잠을 청하거나 간식을 오물거리며 남은 오전 시간을 보내곤 했다. 


2. 일기를 쓰다.      

 병원에서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는 어떻게 이 긴 시간을 보내는가였다. 밖이라면 업무로, 약속으로, 여행으로, 하다못해 혼자 가는 산책으로 시간을 쓸 것이다. 밖에서의 시간은 1시간 2시간을 세는 것이 무색하게 뭉텅뭉텅 시간이 깎여지곤 한다. 하지만 병원에서 시간은 마치 모래사장에 앉아 한 톨씩 모래를 옮기는 모양새와 같았다. 초단위로 시간이 가늠됐다. 그리고 그 시간은 지나치게 느리게 간다.(이 말을 들은 남편은 마치 자신의 군대 생활 때 느꼈던 지루함과 비교했다.) 퇴원 후 가장 놀라웠던 부분이 병원밖에서의 하루 일주일 한 달이 무척 빨리 지나간다는 것을 체감했을 때였다. 병원에서는 아무리 잠을 많이 자도, 유튜브를 보며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도, 소여물을 씹듯 딱딱한 간식을 오물거리며 먹어도 도통 시간을 내버릴 수 없었다. 언니에게 부탁해 몇 권의 책을 읽기도 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눈앞에 있는 아름다운 문장들은 번번이 내 시선을 빗겨 어딘가로 날아갔다. 책 속 각박한 주인공의 상황도 나보다는 괜찮은 것 같았다. 나는 무언가를 보다가도 다시 멍하게 병원 천장을 바라보며 여러 생각에 휩싸이곤 했다. 어찌 보면 밖에서 보는 내 병실 생활은 안전한 요람에 누워 삼시세끼 남이 차려주는 밥을 먹는, 그런 휴식 같은 시간을 취하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마냥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휴식도 여러 선택지 중 하나일 때 가치가 있는 일이다. 몸을 쉬게 하는 것 자체가 일이 되어버리면 이미 휴식의 의미는 저 멀리 날아가 버린다. 게다가 병원에서 생활은 생각만큼 안락하지 않았다. 매일 듣고 보는 환자들의 상황과 의료진들의 경고는 내 불안을 눈덩이처럼 키워가게 만들었다. 너의 생존, 너의 미래, 나와 남편 우리 가족의 미래가 먼바다에서 찾아오는 쓰나미처럼 순간순간 덮쳐왔다. 그런 생각을 하면 숨이 막힐 만큼 막막했다. 가까운 내일이 아예 올 것 같지 않은 먼 미래처럼 느끼는 동시에, 아직 찾아오지도 않은 먼 미래의 일이 당장 눈앞에 닥친 재난처럼 느껴지곤 했다. 

 

 건너 건너 어느 병원에서는 입원해 있는 고위험 산모들이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문화 프로그램을 제공한다더라-라는, 일종의 카더라 풍의 이야기들이 들려오기도 했다. 그렇다면 참 좋겠지만 어찌 됐건 내 일은 아니었다. 하다못해 종이 접기라도 해야지 시간이 갈 것 같아 종이접기 세트를 살까 심각하게 고민을 하기도 했다. 무엇이든, 조금은 생산적인 일을 하고 싶었다. 마음이 편안한 일이면서도 시간을 잘 보낼 수 있으며 어디라도 유용한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입원한 지 3주차가 되었을  언니에게 부탁한 노트를 건네받았다. 좋은 재질의 종이로 만들어진 크로키북이었다. 나는 그때부터 그 노트에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일기에는 온갖 소소한 그날의 일들을 빼곡하게 적어내려 갔다. 마음속의 걱정, 너의 몸무게, 의료진으로부터 들었던 그날의 특이 사항들, 화장실 다녀온 여부, 새로 옆 환자의 증상, 맛없는 병원밥에 대한 욕, 간호사 선생님으로부터 풍겨오는 향긋한 냄새에 대해 (잘 씻지 못하는 내 몸에서 나는 향과 비교했을 때 간호사 선생님들은 항상 향긋한 향이 풍겨왔다.), 큰 목소리로 통화하는 바람에 스트레스를 주는 맞은편 임신부에 대한 원망, 집에 두고 온 첫째 아이 케어하느라 정작 자기 몸은 돌보지 못하는 임신부에 대한 연민, 대체 임신부의 남편은 뭐 하는 사람인가 은근히 미워하는 마음, 먹고 싶은 음식, 남편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제발 산모도 아이도 아프지 않은 세상이 오길 바라는 작은 소망들을 적으며 오후 시간 중 2~30분가량의 시간을 할애했다. 일기를 적는 그 짧은 시간 동안만큼은 무언가 시간을 남기고 기록하는 것에 집중하려 애썼다. 보통 5시쯤 일기를 쓰기 시작하면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다. 환자들의 저녁 식사가 마무리되면, 그렇게 병원의 하루는 마감이 되었다. 


 누군가 그랬다. 일기를 쓰는 이유는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함이라고. 돌이켜보면 나 역시 그러한 마음으로 일기를 썼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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