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넷저고리와 아기 침대
5월. 밖에는 장미가 피었을까 궁금했다.
2023년 5월 20일, 임신 주수 25주가 되었다. 초기에 목표로 했던 24주를 넘긴 것이다.
임신 주수 24주~26주 기간은 제법 안정적인 기간이었다. 물론 병원에 계속 머물러야 했지만 큰 출혈도 없었고, 감염과 같은 심각한 이벤트도 없었다. 그즈음에 너의 몸무게는 800g 정도였다. 200g 한 줌이던 네가, 고작 희미한 노크처럼 내 뱃속에서 토닥거리던 네가, 제법 사람다워졌다 했다. 너는 그 작은 자궁 안에서도 얼마나 깨발랄하게 놀았는지 모른다. 매일 아침 양수 검사를 하던 의사 선생님들도 너의 활발한 움직임을 경이로워하곤 했었다. 아직 잠에서 깨지 못해 멍하게 있다가도 너의 쿵 하는 발차기로 번뜩 정신이 드는 아침을 난 참 좋아했다. 삭막한 병원에서도 내가 의지 할 거라고는 너 하나였다. 무섭고 깜깜한 밤이면 배에 손을 얹고 너의 움직임에 모든 감각을 집중했다. 그러면 어쩐지 너와 함께 그 밤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아 덜 무서워지곤 했다. 너는 알까? 그 작은 너에게 내가 얼마나 기대었는지. 나중에 꼭 들려주고 싶었다.
“그래도 어찌어찌 시간이 가고 있네요”
병원에 입원한 지 한 달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무료하게 침대에 누워 하루하루를 보내는 나를 향해 간호사 선생님들이 힘내라며 한 마디씩 얹어주고 가곤 했다. 그렇다. 어찌어찌 시간은 흘렀다. 나는 이제 너를 살아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가느다란 기대로 더듬더듬 조각난 퍼즐을 맞추듯, 나는 ‘우리가 함께 할 미래’에 대해 생각할 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 속에 항상 조심해야 해,라는 마음이 짙게 깔려 있었지만.
25주가 지나자, 조심스러워하던 가족들도 이제 정말 너를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물론 나는 늘 걱정이 많았다. 24주는 생존을, 25주는 지나야 네 뇌가, 28주는 지나야 폐를 제외한 너의 장기가 발달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매일 살얼음이 낀 호수 위를 맨발로 걷는 느낌이었다. 홀로. 아득히. 돌아갈 곳 없이.
아직까지 튀르키예에 있던 남편은 집에 아기 침대를 사 두는 것에 대한 나의 의견을 물어왔다. 나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적당한 말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 당시 내가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몇 없었다. 확실한 단 한 가지는 우리는 우리 아이를 이른둥이로 만날 거라는 것, 하나였다. 그리고 그 한 문장에 숨은 의미는 무척 많았다.
이른둥이로 아이를 만단다, 는 말은
아이는 태어나 오랫동안 병원 신생아 중환자실(NICU)에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것. 퇴원을 한다고 해도 일반적인 신생아보다 훨씬 자주 병원을 다녀야 한다는 것, 그렇다면 튀르키예로 아이를 데려가기 위해서는 남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긴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는 것. 그 탓에 나와 아이는 한국에 남고 남편 홀로 튀르키예로 돌아가 생활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 등등... 그리 유쾌하지도 심플하지도 않은 차가운 현실을 담은 문장이었다.
아기 침대에 대해 조심스레 부정적인 의견을 내비치자 남편은 기어코 화를 냈다. 왜 자신은 아이를 위해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하냐고. 왜 우리 아이를 행복하게 만날 수 있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게 하느냐고 좌절했다. 나는 그저 속절없이 눈물이 났다. 내 말은 지나친 걱정일 수도 있지얂냐는 그의 말을 나 역시 믿고 싶었다. 하지만 아닌 걸 어떡하란 말인가. 임신 초기, 오랜 출혈로 침대에 누워 지낼 때 나 역시 매일 생각했다. 침실 어디쯤 아기 침대를 놓으면 가장 좋을지. 그래, 그냥 모든 게 내 탓인 것만 같아 남편과 전화를 끊고 엉엉 울었다.
다음날 엄마 전화가 왔다. 25주도 지났고 이제 슬 아기가 태어날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으니 언니와 같이 배넷저고리나 우주복, 아기 담요 같은 기본 육아 용품을 사러 간다고 말이다. 어제 남편과의 통화 후 허물어져있던 내 마음을 아직 단단하게 보수하지 못한 때였다. 아기 용품이라니. 임신하고 하고 싶었던 것 중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이 <남편과 아기용품 사러 가기>였다. 아기자기한 아기 옷과, 장난감, 아기가 물고 빨 젖병, 작은 양말과 모자, 부드러운 담요.
나는 아기 용품을 사러 간다는 엄마의 말을 듣자마자 그 자리에서 통곡했다. 우는 나를 향해 엄마는 섭섭해하지 말아라, 며 달랬다. 하지만 내 눈물은 엄마의 행동이 섭섭해서 흐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작금의 내 상황이, 남편조차 아무것도 하지 말라 말해야 하는 내 상황이, 기가 차서 나는 눈물이었다.
그날 오후, 엄마는 귀여운 토끼가 그려진 담요와 하얀 우주복 사진을 보내왔다. 옷이 너무 예쁘고 귀여워 나는 또 울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