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s 커넥션
이러나저러나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 그런 걸까.
나는 평소에도 인간관계에 대해 크게 마음 쓰며 살지 않았다. 가족이 있고, 마음 나눌 친구 몇이 있으니 그것으로 충분했다. 나는 극한으로 내향인의 선천적인 성향과, 사람이 많지 않은 작은 동네에서 살았던 유년기까지 더해서 잘 알지 못하는 사람과 친구를 맺는 것이 영 어려웠다. 게다가 많은 지인을 둘 만큼 그리 많은 에너지를 소유하지도 못한 채 살기도 했다.
병원에서 누워 그야말로 망망대해에 '고립된 섬' 신세가 되고 보니 목마른 사막에서 물을 찾듯 사람을 찾게 되는 것은, 나 역시 어쩔 수 없이 사회적 동물 중 하나라는 반증이 아니면 무어라 할 수 있을까.
물론 이런 특수한 상황에서 보다 내 상황을 잘 이해하고 공감해 줄 사람을 더 애타게, 그렇지만 조금은 거리감이 느껴지는 곳에서 찾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나의 고통이 곧 '나의 고통'이 되어버리는 가까운 가족들에게는 내 마음을 생선살을 발라내듯 살뜰하게 이야기할 수 없었다.
네이버에서 임신 관련하여 가장 활발하게 소통되는 카페가 있다. '맘스홀릭 베이비'라는 카페다. 이곳에는 임신과 관련하여 정보 및 고민거리를 나눌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카테고리들을 나누어 놓았다. 예를 들어 임신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과, 임신을 한 임신부들의 공간, 유산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여성들의 고충을 나누는 방, 시험관 준비와 관련된 정보와 마음을 나누는 방 등 '임신'이라는 키워드를 훨씬 더 세밀하게 나누어 서로 더 교집합이 큰 사람들끼리 깊은 이야기를 소통할 수 있도록 카페를 설계해 뒀다. 물론 이외에도 공구, 육아 용품 중고거래, 태아 보험 관련 정보 등 임신이라는 소재를 아우르고 있는 외적인 정보들도 수집하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렇다 보니 내가 임신했다는 것을 말했을 때 친구도 언니도 이 카페에서 정보를 얻도록 유도했던 것이 단순한 우연은 아닐 것이다.
처음에는 그저 눈대중으로 나와 주수가 비슷한 사람들은 어떤 고민과 이야기를 나누나 살펴보기만 했었다. 그러던 것이 어느새 익명의 힘을 빌어 나의 이야기도 조금씩 이야기하게 되었다.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마음의 소리가 결국 키보드로 옮겨간 것일 수도 있고, 같은 처지에 있거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위로를 받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조기양막파수로 입원해 있으니 막막하다'라는 글을 쓰자, 그 아래 여러 댓글이 달렸다. 내 상황을 위로하는 글도 있고, 비슷한 상황으로 고충을 겪었던 선배 산모들도 있었으며, 나와 같이 현재 병원에 입원하여 하루하루를 눈물로 보내는 사람의 글도 보였다. 그렇게 만나게 된 사람이 '튼튼이 엄마'였다.
튼튼이 엄마는 인천에 있는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나와 주수 이틀 차이밖에 나지 않았고 조기양막파수로 양수가 새는 증상도 같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인천 병원은 침상 절대 안정을 원칙으로 하기에 나보다 움직임에 훨씬 제약이 많다고 했다. 내가 입원한 병원은, 물론 격렬한 운동을 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임신부가 움직이는 것을 장려하는 분위기였다. 때문에 식판을 치우고, 화장실을 가고, 치료실 복도를 왔다 갔다 하며 조금은 움직일 수 있는 동선을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나의 경우 움직인다고 양수가 더 새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가만히 누워 잠을 자는 밤에 양수가 새는 경우가 더 많았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경험일 뿐, 조기양막파수가 된 모든 임신부들이 나와 같은 패턴이라 말할 수 없다. 튼튼이 엄마의 주치의는 산모의 움직임을 제한하는 것이 아이를 더 잘 지키는 방법이라 판단했고, 그에 따라 튼튼이 엄마 역시 이미 몇 달째 침대에 누워 뱃속 아기를 지켜내고 있었다. 카페에 내가 쓴 글을 발견한 건 튼튼이 엄마였다. 나를 보며 튼튼이 엄마 역시 보다 내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소통 창구를 발견한 것 같았으리라. 튼튼이 엄마는 조심스레 내게 사적인 연락을 해도 될지 물어왔다. 나는 흔쾌히 전화번호를 알려줬고 그날부터 튼튼이 엄마와 나는 카톡 친구가 되었다. 막 22주차를 넘겼던 5월 초였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 간밤의 안부를 물었고 잠들기 전 무사히 지나간 오늘 하루를 함께 감사하며 잠이 들었다. 서로의 병원 생활에 대한 고충과 갑작스럽게 컨디션이 나빠졌던 순간에 대해 함께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했다. 튼튼이 엄마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처음 대화의 물꼬를 튼 지 얼마 되지 않을 무렵부터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튼튼이 엄마의 문장은 따뜻하고 사려 깊었다. 그녀는 이미 나보다 오랜 병원 생활을 지내고 있었다. 지칠 법도 한데 그 와중에도 내 처지를 위로하고 보듬었다. 어떤 때인가 서로의 병원 사진을 교환하기도 했는데, 나는 그를 통해 내가 입원한 병원 시설이 정말 낙후된 곳인지 다시 한번 상기해야 했으므로 웃기면서도 슬픈 순간이었다. 가끔은 병원과 상관없는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주고 받기도 하고, 심기를 건드리는 옆 침대 산모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기도 했다. 담당의와 나눈 대화를 주고받으며 한없이 불안하기만 한 미래에 대해 낙담하다가도 뱃속 아이의 태동에, 재미있는 움직임 한 번으로 함께 함박웃음을 짓기도 했다. 한 번도 만난 적도 없고 어느때까지는 서로의 얼굴도 이름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의지했다. 튼튼이 엄마 역시 그러하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튼튼이 엄마에게도 나에게도 의지하기 충분한 남편이 있었고 부르면 어디서든 나타날 가족들이 있었다. 하지만 내 몸과 마음에서 발아하는 이야기는 시시각각 울창한 숲이 되어 멀리 번져가고 있었다. 내 걱정의 덩굴로 그들의 삶을 다 덮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기에 서로가 서로를 의지할 수 있는 누군가를 찾다가 발견한 것이 나에게는 튼튼이 엄마가, 튼튼이 엄마에게는 내가 되었던 것 같다. 다행히 우리는 기꺼이 서로의 그늘이 되어주었다. 22주, 23주... 그렇게 한주 한 주를 우리는 함께 힘겹게 건너갔다. 그때마다 이번주를 어떻게든 버텨낸 서로를 격려했고 그다음 주까지 또 잘 버텨내기로 약속했다.
인천과 부산. 서로 등지고 선 바닷가 병원에 누워 뱃속에 곤히 잠든 두 아이에 대해, 두 아이를 키울 가깝고 먼 미래에 대해 이야기했던, 넘실거리는 밤들을 기억한다. 두 가족이 만나 함께 이 긴 투병 생활을 이야기하거나, 친구가 된 두 아이를 바라보는 상상을 참 많이 했었다. 튼튼이 엄마와는 아직도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지낸다. 그때 우리가 왜 그렇게 서로에게 의지하며 지냈는가 우리 역시 미스터리하다. 우리는 아직 한 번도 실제로 만난 적이 없다. 하나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직접 만나게 된다면 아마 말없이 서로를 꼭 안아줄 거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