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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EK Miyoung Jan 22. 2024

지난여름, 산에게

남편 오다. 수축 오다.

 5월 중순~말까지 병원에서 꽤 양호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병원에서도 그 당시 내 컨디션에서 이 두 가지만 오지 않는다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했다. 바로 감염과 수축. 이 두 가지는 내가 입원 기간 내내 되도록 만나지 않길, 만나게 되더라도 가장 늦게 만나길 바라는 증상들이었다.


 양막이 손상됐다는 말은 단순히 양수가 새는 것뿐 아니라 아이를 보호하는 보호막이 손상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손상이 된 양막으로 치명적인 균이 들어와 뱃속 태아가 감염이 될 위험도 매우 높다. 당연히 아이의 상태는 위태로워진다. 더구나 태아가 감연이 될 경우, 그 순간부터 태아는 모체의 건강에 직접적인 위해요소가 된다. 아이도 엄마도 함께 위험해지는 최악의 상황이 되는 것이다. 약을 써도 감염이 잡히지 않는다면 그 즉시 출산을 진행시켜야만 한다. 나는 이러한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계속해서 항생제를 투여받는 동시에 3일에 한번 감염 수치를 측정했다. 물론 이러한 조치로 감염을 100% 예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늘 감염 수치가 0이더라도 당장 내일 감염이 되어 걷잡을 수 없을 숫자가 나올 수도 있으니 언제나 긴장하고 지켜봐야 했다. 17주에 파손된 내 양막은 용케도 5월 중순까지 감염 없이 버텨내고 있었다. 그때가 24~26주차 정도로, 이미 두 달가량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병원에서는 항생제를 제거한 채로 감염 수치를 예의주시해 보자고 제안했다. 만약 항생제가 없어도 수치가 안정적이라면, 나는 주삿바늘과 귀찮은 링거 폴대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수축은 또 다른 복병이었다. 수축이란, 자궁이 출산 준비를 시작하는 신호탄과 같다. 자궁이 일정하게 쪼이고 풀어지는 진통이 시작되면서 아이를 밖으로 내보낼 준비를 하는 것이 바로 '수축'이다. 당연히 만삭 전까지 오면 안 되는 증상이지만, 때로는 안정적인 임신 과정을 거치다가도 조기 수축이 와 이른 출산을 경험하게 되는 산모들도 더러 있다. 나는 불규칙적인 출혈과 주기적인 양수 빠짐을 동반하고 있으므로, 언제 수축이 찾아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이렇게 불안정한 임신 상태인 사람에게 수축은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치명적인 손님과도 같다. 그중 다행은 내가 입원해 있는 덕분에(?) 수축이 시작되면 곧바로 수축억제제를 투여받아 수축을 미루는데 모든 집중을 다 할 환경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었다. 문제는 수축억제제의 부작용이다. 수축억제제는 단순히 수축을 억제하는 기능만을 발휘하지 않는다. 라보파, 트랙토실, 마그네슘 등 여러 수축 억제제들이 그들 나름의 부작용을 동반하는 약물들이다. 나는 이러한 사실도 입원을 통해 알게 되었다. 수축억제제를 맞고 밤새 힘에 겨워 울던 산모들을 난 여러 번 보았다. 심장이 두근거려 잠을 자지 못하고, 손떨림으로 인해 밥 먹는 것을 어려워했으며, 매 소변 때마다 소변량을 측정해야 했다. 가장 흔하게 사용하는 수축억제제인 라보파의 경우 최대 부작용은 폐에 물이 차는 증상이다. 미국에서는 그로 인해 산모가 사망했던 사고가 있었다고 한다. 나는 수축억제제를 맞게 될 날이 언젠가 오겠지만 그날이 최대한 지금으로부터 멀고, 되도록 그 기간은 짧을 수 있기를 바랐다. 


6월 1일. 튀르키예에 있던 남편이 왔다. 

어쩐 일인지 나보다도 간호사분들이 훨씬 더 기대했던 재회였다. 입원 후 한 달이 넘도록 찾아오지 않는 남편을 병원 스테프 모두가 궁금해했고, 그탓에 남편이 해외에서 일을 한다는 것을 모두 알게 되었다.(남편이 터키분인가요? 는 항상 덤처럼 딸려오는 질문이다.) 한 달 하고 열흘 만에 보는 남편이었다. 그간 남편의 상황을 뻔히 알면서, 또한 남편의 일상만큼은 지키고 싶다는 어른스러운 마음 한편에 왜 당장 내 곁으로 달려오지 않느냐는 어린애 같은 투정이 툭 하고 터져 나왔던 것이 여러 번이었다. 당장 한국으로 튀어오지 않는 남편을 향해 독설 아닌 독설을 날린 것 역시 여러 번이었다. 남편은 공식적으로는 교수지만 튀르키예 공무원과 비슷한 신분이었으므로, 본인이 외국인일지라도 해외에 오랜 기간 머무는 것은 예외이자 특혜였다. 때문에 동료 교수들의 납득과 배려, 그리고 학교 행정상의 공식적인 절차라는 최대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한 후에 한국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 남편의 생각이었다. 남편 입장에서는 자신의 자리를 견고하게 해 두는 것이야말로 우리 가정을 지키는 또 하나의 방편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그 와중에 당장 와라, 오냐 그냥 일 같은 거 다 때려치우고 그리로 가마, 둘이 7살 난 꼬맹이처럼 옥씬각씬 했던 것을 여기 길게 쓸 필요는 없겠지.


 우리는 담백한 재회를 했다. 눈물도 탄성도 없는, 산뜻한 만남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남편은 그저 몇 시간 전에 본 사람처럼 친근했다. 우리의 재회에 간호사분들이 어쩐지 더  김새하는 것 같았다. 남편은 그사이 내 배가 많이 커졌다고 했다. 암만 커져도 병실 안에서는 여전히 제일 작은 배였다. 그때까지 내 감염수치는 안정적으로 유지된 덕분에, 나는 주삿바늘과 폴대 없는 자유로운 병원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아마 모르는 사람이 보았으면 내가 그곳에 왜 입원해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남편과는 30분, 그리 길게 보지도 못한 채 내일을 기약했다. 남편은 내일 오는 길에 도시락을 싸 오마 약속을 했다. 나는 생각이 날 때마다 먹고 싶은 간식을 적어 남편에게 보냈다. 먹고 싶은 베이글과 딸기주스, 레몬향이 든 탄산수 등등을 남편은 잘 메모해 뒀다가 내일 면회 시간에 맞춰 가지고 오겠노라 말했다.


 남편과 재회한 그날 저녁, 나는 별생각 없이 핸드폰으로 TV를 보고 있었다. <장사천재 백사장> 8회인가 9회를 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때 뭔가 아래에서 축축한 액체가 느껴졌다. 별 통증이 없었기 때문에 또 양수가 빠지는 거라 생각하고 몸을 일으킨 그때, 아래로 주르륵하고 무언가가 더 흘러내렸다. 피였다. 왈칵왈칵 피가 새고 있었다. 당황한 나는 그 자리에 선채로 간호사 선생님의 팔을 붙잡았다. 곧바로 상황을 파악한 간호사 선생님은 서둘러 나를 침대에 눕혔다. 어제 오후, 내 맞은편에 침상에 입원해 있던 산모가 밥을 먹다 피가 쏟아져 응급실로 실려가는 것을 봤던 터였다. 태반이 떨어졌다 했던가, 만약 그 환자가 병원에 입원한 것이 아니었다면 매우 위험했을 거라 했던가, 갑자기 그 모든 상황들이 내 상황에 대입되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서둘러 초음파실로 가야 했다. 하지만 약간만 움직여도 피가 쏟아졌다. 나는 그대로 휠체어에 앉혀져 10미터도 안 떨어진 초음파실로 끌려갔다. 남편 만난다고 오늘 막 샤워도 했고, 뽀송한 새 환자복으로 갈아입었는데 이게 뭐람'이라는 생각을 잠시나마 했던 것 같다. 경환자에서 중환자로 넘어가는 길목은 종이 한 장만큼 얇았다. 초음파실에 누워 태아에게 가는 혈류, 태아의 심박, 심전도까지 검사를 했다. 다 괜찮았다. 하지만 수축이 왔다. 그렇게도 늦게 마주하고 싶었던 그 녀석을 마주하고 만 것이다. 

 27주차 트랙에 올라갈 날을 며칠 앞둔 날이었다. 

 어떻게 임신은, 이다지도 나에게 다정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절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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