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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EK Miyoung Jan 24. 2024

지난여름, 산에게

코로나에 걸리다(1)

 임신 24주를 넘겼을 때부터 응급 수술을 대비하여 일주일에 한 번 코로나 검사를 받아야 했다. 코로나에 걸린 환자는 수술대에 아예 오르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매우 복잡한 절차가 필요하기에 의료진들도 상당히 꺼리는 상황이라고 했다. 28주 트랙에 올라선 주말 아침 역시,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코로나 검사를 받았고, 그와는 상관없는 작은 자축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 28주차에 도달한 것이다.

 2023년 6월 10일. 초여름.

그렇게나 기다리던 28주차에 도달했다. 물론 30주를 넘기길 간절히 바랐지만, 우선은 28주까지 버틴 스스로가 대견했다. 나는 카페에 28주 자축 글을 올렸다. 얼굴도 모르는 나를 응원해 준 산모들에게 감사를, 나와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는 임신부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다. 막 글을 쓰고, 남편이 가져다준 두유를 까먹으려던 찰나였다. 당황스럽지만 최대한 차분한 어조로, 간호사 선생님이 나를 잠깐 병실 밖 간호사 데스크로 나와달라 요청했다. 마스크를 꼭 착용하고 말이다. 나는 손에 쥐고 있던 두유를 놓아둔 채 별생각 없이 밖으로 나갔다. 데스크 앞에서는 초조한 표정의 병원 스테프들이 모여있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코로나 테스트 양성 반응이 나왔다는 소식을 내게 전했다. 나는 어딘가 한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코로나라니, 지금? 내가???

나보다 더 당황한 건 의사 선생님들이었다.

“환자분 코로나면 절대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선생님은 2차 검사를 위해 내 코를 면봉으로 찌르며 주문을 외듯 말했다. 다른 외부는 코로나로부터 한 발짜국 물러났을지 몰라도 병원 안에서는 아직 코로나를 무척 경계하고 있었다. 병원 입구부터 KF9검증 마스크를 써야만 했다. 고위험산모 병동은 짧은 30분의 면회를 위해 보호자들은 신속 항원 혹은 PCR검사를 받아야 할 만큼 엄격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그런데 코로나라니, 이해할 수 없었다. 남편으로부터 옮은 건가?(남편은 PCR검사를 통과했다) 아니면 잠깐 마실 다녀온 편의점에서? 아니면 면회를 온 다른 보호자로부터? 도대체 어디에서 감염이 일어난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솔직히 그때까지만 해도 나를 비롯한 의료진 모두 검사 결과가 무언가 잘 못 나왔을 거라 생각했다. 우선은 2차 검사 결과를 기다려야 했으므로, 나는 치료실 옆에 비어있는 진통실로 잠시 자리를 옮겨 가있기로 했다. 그러나 만약 2차 검사도 양성이 뜬다면 어떡해야 하나, 간호사 선생님을 붙잡고 물었다. 간호사 선생님도 잘은 모르지만 설마 나를 다른 병동으로 보내지는 않을 거라 조심스레 답했다. 그래, 이제 막 28주가 된 나를, 게다가 수축 탓에 수축억제제도 투여받고 있는 나를 고위험 산모 치료실 밖으로 보낼리는 없을 거라 안심하려 했다. 2시간이 지나 검사 결과가 나왔다. 양성이었다. 여태 심각한 코감기라 생각했던 것의 실상은 코로나였던 것이다. 열이 없었기 때문에 의료진도 나도 전혀 눈치채지도 의심하지도 못했다. 코로나라니. 지금 내가 마주한 현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오 신이시여.


 나는 진통실에서 다시 한번 초음파 검사실 옆 빈 병동으로 옮겨졌다. 아직까지는 고위험 산모 치료실 내에서 전전하고 있다. 다른 병동으로 옮겨지지 않을 거라는 희망이 있어 보였다. 간호사 선생님의 안내로 가게 된 빈 병동에는 내 병원 짐들이 모두 옮겨져 있었다. 이미 병원 생활을 7주 가까이 지나던 차였다. 짐이 어디 한두 가지였겠는가. 내 옷가지, 쿠션, 여름이라고 남편이 이고 지고 왔던 쿨메트, 냉장고에 놔뒀던 제철 과일과 간식, 책, 세면도구, 수저 세트, 오늘 남편이 들고 왔던 '본죽' 반통과 베이글, 그리고 내가 간호사 선생님에게 불려 가기 진전까지 손에 쥐고 있었던 두유까지. 모두 그리로 옮겨져 있었다. 나는 마치 통보도 받지 못하고 갑작스레 쫓겨난 세입자가 된 느낌이었다. 짐들은 모두 길 위에 나뒹굴고 도무지 갈 곳은 없는 세입자처럼 나는 덩그러니 서 있었다. 의료진들의 상황을 이해 못 할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배신감이 느껴졌다. 이렇게 내 침상을 빼버렸다고? 저렇게? 갑자기?

 갑자기 의사 선생님이 조심스레 내 옆으로 다가와 무언가를 내밀었다. 동의서였다. 나는 더 이상 고위험산모 치료실에 머무를 수 없고, 7층 코로나 격리 병동에 일주일간 격리되어야만 한다 했다. 그 사실에 동의한다는, 사인을 해달라 말했다. 나는 망연자실했다. 그간 어떻게든 기운을 냈지만 그때처럼 마음이 무너진 적은 없었다. 임신 28주. 줄줄이 달고 있는 수축억제제. 쇠약해진 몸. 낯선 병동에서 낯선 의료진들의 케어를 받아야 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나랑 아이를 죽일 셈인가요? 

 나는 차마 입 밖으로 말을 할 수 없었지만 그 순간 내 주변 모든 것들이 다 나와 아이를 죽일 것만 같은 두려움이 몰려왔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덜덜덜 떨고 있었다. 의사 선생님이 말했다.

“… 거기도 여기서와 같이 케어해 드릴 거예요. 울지 마세요.”


코로나 격리실은 한층 위인 7층이었다. 간호사 두 분이 대동했다. 한분은 내 짐이 든 수레를 끌고, 다른 한분은 내 휠체어를 끌었다. 나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휠체어에 들려갔다. 격리실은 다른 느낌으로 삼엄했다. 병동까지 들어서는 문은 이중문으로 오가는 모든 것을 검사&소독했고, 의료진들 모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방호복을 입고 있었다. 내 휠체어를 끌던 간호사가 코로나 격리실 간호사에게 내 휠체어를 넘겼다. 이중문을 넘어 격리실에 들어서자, 간호사는 혹시 내가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지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자, 간호사는 수레에 든 짐을 덩그러니 내 옆에 두고 자리를 떠났다. 코로나 격리실은 음압병실*(병원 내부의 병원체가 외부로 퍼지는 것을 차단하는 특수 격리 병실)로, 창문을 열지 못하게 모두 막아둔 채였다. 그 탓인지 병실 안 공기가 유달리 무겁고 두텁게 느껴졌다. 이제 일주일간 병실 문밖으로 한 발짜국도 나갈 수 없다. 곧 다른 간호사가 선생님이 들어와 내가 머물 병상을 안내했다. 그곳에는 고위험 산모 치료실에서와 같은 커튼막이 전혀 없었다. 병실 천장에는 환자들을 감시하기 위한 CCTV가 설치되어 있었다. 수레에 든 내 짐을 알아서 정리하라는 말을 남기고 의료진들은 떠났다. 짐은 산더미 같았다. 고위험 산모 치료실에서는 이 모든 것을 간호사 선생님들이 해주었다. 산모들이 힘을 써 움직이는 것을 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고위험 산모 치료실과 같은 케어를 해줄 거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나는 침대와 벽이 맞닿는 구석에 몸을 숨기고 울었다. 의료진들이 내 앞에 와서 뭐라 뭐라 이야기를 했지만 하나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패닉이 왔다. 내 주변에 오는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해를 가할 것 같았다. 계속 몸을 떨고 우는 통에 몸 아래에서 양수가 훅 하고 빠져나왔다.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내 고통은 어디까지 이르는지 세상이 시험하는 것 같았다. 그냥 이대로 어디 몸을 던져서라도 죽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남편이 왔다.

 격리실에는 간병인이 상주할 수 있었다. 단, 그 간병인 역시 병실에 들어온 이상 나갈 수 없었다. 코로나에 걸려도 병원에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일주일간 마실 물을 가방에 가득 챙겨 남편이 격리실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것이다. 남편의 얼굴을 보고서야 나는 조금 안정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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