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에 걸리다(2)_격리실의 단상들
몸을 거동할 수 있는 환자가 코로나에 걸리면 자택으로 가 격리 기간을 보내면 그만이었다. 그러다 보니 격리실에 실려오는 사람들은 몸을 건사할 수 없거나, 24시간 케어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었다. 할머니들과 간병인들 그리고 나처럼 퇴원이 불가능한 고위험 산모가 그에 해당되는 경우였다. 물론 내가 갔을 때 산모는 나 하나였고 모두가 몸져누운 할머니들이었다. 그나마 위안은 할머니/할아버지 병동은 분리시켜 주었다는 사실이다. 옆 병실, 할아버지들이 계시는 병실은 훨씬 더 (여러 의미로) 상황이 어렵다고 했다.
격리실로 옮겨올 때 가지고 있던 음식을 모두 버려야만 했다. 외부 음식 반입을 금지하는 통에 격리실에서 먹을 것은 오로지 병원밥뿐이었다. 기껏 가족들이 챙겨준 음식들을 모두 버려야 하는 것이 아깝고 가슴 아팠다. 격리실에서는 먹을 물도 환자가 따로 챙겨야 한다고 했던 모양이다. 남편은 2.5L 생수 5병을 바리바리 싸들고 격리실로 들어왔다.
격리실은 우울 그 자체였다. 병상에 누운 할머니들 대부분, 정신이 온전한 분이 거의 없었다. 낮에 주무시다가 밤과 새벽이 되면 간병인들을 깨워 무언가를 요구하거나, 멍하게 허공을 응시하다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뱉곤 했다. 그것이 거슬리기보다는 슬펐다. 나이가 든다는 것, 건강하지 않다는 것, 내 마음대로 앉았다 섰다 할 수 없는 지경이 되는 것, 모든 것은 눈에 선명하게 보이는 서글픔이었다. 덕분에 내 마음을 한 겹 더 나이가 들어버렸다.
하루 한번 내 상태를 체크하기 위해 6층 의료진들이 7층 병동으로 올라왔다. 온몸에 방호복을 착용하고 초음파 기계를 앞세운 그분들도 격리실에서 환자를 보는 것은 아마 처음이었을 것이다. 가림막이 존재하지 않는 병실의 상태에 다들 당황했다. 초음파 기계를 질 안에 넣어 봐야 한다. 격리실 의료진들에게 가림막을 가져다줄 것을 부탁해서 그것으로 어찌어찌 병상을 둘러싼 외벽을 만들었다. 그래봤자 내 다리 위쪽으로 덩그러니 CCTV가 달려 있었다. 격리실 환자들을 감시하기 위한 카메라였다. 이제 그런 것으로 시시비비를 가릴 기운도 없었다. 나는 내 몸에 대해 반쯤 포기한 채 지냈다. 격리 기간 동안 출산을 맞이하는 상황은 최대한 피해야 했다. 자칫 출산 후 다시 격리실로 돌려보내지는 경우가 초래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딱 일주일. 최대한 진통이 오는 것을 미뤄야 했다. 처음 이틀정도만 처방할 거라던 마그네슘을 이미 일주일 넘게 맞고 있었다. 마그네슘을 제거하면, 그 순간 수축이 왔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계속 마그네슘을 달고 있어야 했다. 격리실에 올라가 있는 동안에는 더 적극적으로 마그네슘을 썼다. 그 탓에 내 의식은 더욱 흐릿해지고 나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지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남편은 그때 처음으로 내가 병원에서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 목격하게 되었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내 모습이 훨씬 비참했던 모양이다. 내가 멍하게 누워있으면 남편은 내 이름을 계속 불렀다. 마치 어디 멀리 가는 사람을 붙잡으려는 듯 애타게 이름을 불렀다.
격리 3일째 되는 날, 남편을 격리실 밖으로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수축이 심해지고 있었다. 이대로 출산이라도 하게 되면 부모 중 한 명이라도 건강하게 아기를 맞아야 했다. 이대로 남편까지 코로나에 감염되면 아기가 NICU에 가더라도 그를 케어할 부모가 없게 된다. 뿐만 아니라 간병인들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이 너무나 한정적이었다. 남편의 키가 그리 크지 않음에도 간의 침대의 길이가 턱없이 모자랐다. 지난 이틀 밤, 남편은 몸을 접은 채로 새우잠을 자야 했다. 남편의 얼굴에도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코로나가 아니더라도 다른 방면으로 병이 도질 것 같았다. 남편에게 이 같은 뜻을 전하자, 처음으로 내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이곳에, 이 지옥 같은 곳에 너를 혼자 어떻게 두느냐고 울었다. 나 역시 그곳에 홀로 지내는 것이 암담했다. 하지만 내 몸과 마음만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남편은 가지고 왔던 물병을 내가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두고 격리실 밖으로 나갔다.
격리실에서는 한 시간이 하루 같았다. 남편이 떠나자마자 널널했던 병실이 새로이 들어온 환자와 간병인으로 꽉 찼다.(여러모로 남편이 참 적절할 때 나간 것이다.) 지척의 거리에서 간병인들은 할머니들의 채취가 묻은 기저귀를 갈고 그들의 몸을 씻기고 있었다. 나는 도무지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제발, 밥시간이 저분들의 용변 시간이 아니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어느 날 아침, 환자들 밥 나오는 시간이 여느 때와 달랐던 것일까. 옆 할머니의 간병인이 이른 아침부터 자신의 식사와 할머니의 식사를 챙기고 있었다. 나는 불안했다. 내 밥시간이 저 환자분의 용변 시간과 겹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나는 호출 버튼을 불러 얼른 내 밥도 가져다 달라 진상을 부리다 울었다. 어째서 이런 걱정을 하면서 살아있어야 하는지 누구든 붙잡고 묻고 싶었다. 그날 아침, 결국 나는 아무거도 입으로 넘기지 못했다.
격리실로 올라오면서 나는 내가 가진 모든 음식을 다 폐기해야만 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내 주변에 있는 할머니와 간병인들은 외부 음식들을 챙겨 와 살뜰하게 먹고 있었다. 나는 울분에 차 밖에 있는 남편에게 이 사실을 말했다. 대부분의 일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남편도 그 이야기에는 분개했다. 남편은 속옷과 같은 자잘한 물품을 종이백에 담아 병실로 전달하면서,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 있는지 담당 간호사들에게 물었다고 한다. 아마 은근한 질책도 덧붙였을 것이다. 의료진들 역시 병실 안의 상황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음식을 제한하는 것에 대한 간병인들과 환자들 가족의 반발이 무척 컸고, 그로 인해 의료진들과 마찰이 빈번했던 탓에 짐짓 모른척하고 지낸다고 답해왔다고 한다. 거동이 힘들고 입맛이 까다로울 수 있는 노령의 환자들이기에 의료진들도 모든 음식을 제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지만 모든 음식을 처분하고 온 나는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시무룩해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남편이 전달해 준 종이백을 열어보았다. 그런데 종이백 안에는 남편이 몰래 숨겨둔 편의점 간식들이 섞여 있었다. 단호박 퓌레와 내가 좋아하는 딸기 주스였다. 나는 허겁지겁 간식을 입에 욱여넣었다. 그 후로도 종종 남편은 짐 전달을 핑계로 몰래 간식을 넣어줬고 덕분에 약간의 입맛을 회복할 수 있었다.
격리실에 딸린 화장실은 딱 하나였다. 시설 노후로 인해 샤워는 금지였다. 그러므로 일주일간 나는 씻을 수 없었다. 이제 씻지 못하는 것에도 이골이 났다. 아무렴 어떤가. 꽃단장을 하고 누굴 만날 일도 없으니 상관없었다. 격리 기간 동안 내 옆 할머니 환자의 간병인은 무척 신경이 거슬리는 사람이었다. 환자와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으로, 보통보다 높은 간병비를 받고 일주일간 격리된 채로 환자를 돌보아주고 있었다. 말이 많았고, 종종 혼자 있는 것과 같은 목청으로 친구와 통화를 했으며, 종종 할머니에게 짜증을 내기도 했지만, 대체로는 사람 좋은 간병인이었다. 다만 자신이 잘 공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환자 할머니의 침상을 계속 내쪽으로 미는 바람에 나의 이동 동선을 좁아지고 있는 것이 거슬렸다. 또 한 번은 내가 화장실을 쓰고 있노라 안에서 말했음에도, 계속 문을 달칵거리며 여는 통에 내가 빽 하고 소리를 내지른 적도 있었다.(내가 그런 고음으로 소리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나는 소변을 볼 때마다 소변량이 얼마인지 체크해야 했기에, 화장실 안에서 보통 때보다 훨씬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격리된 지 5일쯤 지났을 무렵, 그분이 난데없이 내 머리를 감겨주랴 물어왔다. 아마 내가 안 돼 보였던 모양이다. 능수능란하게 할머니도 씻겼던 분이니, 내 머리를 감기는 것쯤이야 아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괜찮다 말했다. 마음은 감사하지만 의료진이 아닌 누군가가 내 몸을 만지는 것이 그때는 극도로 꺼려졌기 때문이다. 그런 모습을 돌이 켜봤을 때 역시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다시 생각해도 참 말 많고 때로는 염치도 없는 분이었어-를 되뇌게 만드는 분이셨다.
격리 7일 차 오전 12시. 나는 격리실을 나와 6층 고위험 산모 치료실로 다시 내려보내졌다. 죽지도 않고 돌아온 각설이처럼, 나는 또 일주일을 버텨냈다. 격리실에 있는 환자 대부분은 격리가 끝난 그다음 날 오전에 원래 병동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단 1분도 그곳에 더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 남편 역시 6층 의료진들에게 찾아가 사정사정했다. 제발, 12시가 넘으면 나를 바로 데려가달라고 말이다. 고위험 치료실 의료진들도 격리실 병실 여건이 썩 좋지 않다는 것을 이미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터라, 우리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주었다. 머리에 기름이 줄줄 흐르는 채로 터벅터벅, 나는 다시 짐수레와 함께 6층으로 내려갔다. 늦은 새벽, 치료실에 머무는 다른 산모들을 깨우지 않기 위해, 나는 그 옆에 있는 빈 병동에 들어가 그날밤을 보냈다. 나는 간호사 선생님께 부탁해 우선 샤워를 했다. 샤워 후 병실 창문을 열어 시원한 밤공기를 폐 깊숙이 넣었다. 일주일 만에 맡아보는 신선한 공기였다. 그날밤은 내 평생 손에 꼽을 만큼 깊은 단잠을 잤다. 할머니들의 고함 소리도, 간병인들의 투덜거림도 없는 조용하고 쾌적한 병실에서, 나는 29주차를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