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JTBC 서울 마라톤
나에게는 소중한 친구가 있다. 언제나 열정적으로 세상을 두리번거리고, 새로운 경험을 값지게 생각하며, 그러한 경험을 함께 해보자고 제안해주는 친구. 몇 달 전, 친구네 자취방에서 시원하게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친구가 불쑥 마라톤에 신청해보라고 했다. 자기가 얼마 전 마라톤 대회를 나가보았는데 아주 만족스러웠고, 참가비가 5만원이라 부담이 될 수도 있겠지만 다양한 참가물품들을 득템할 수 있으니 마냥 비싼 것만은 아니라며 나에게 영업을 펼치기 시작했다. 자기는 이미 신청을 해 두었다는 말과 함께, 그가 늘 입버릇처럼 말하는 'Why not?'이라는 표현으로 대미를 장식하며 친구는 프레젠테이션을 끝마쳤다. 운동의 필요성을 항상 느끼고 있었고, 당시 취업한지 얼마 되지 않아 재정적으로 여유로웠으며, 눈썰미 있고 트렌드에 민감한 나의 친구가 추천하는 것은 항상 퀄리티가 보장되어 있었기에 나는 "고고!"를 외쳤다. 그 자리에서 결제까지 끝내버린 뒤, 함께 공유할 새로운 추억을 앞두고 우리는 더욱 즐겁게 맥주를 홀짝거렸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마라톤 대회에 신청을 해 두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던 무렵, 택배가 하나 날아왔다. 운동화 박스를 연상시키는 박스 안에는 마라톤을 뛸 때 배에다 붙일 번호와 기록인식칩, 가슴팍에 주최사인 JTBC와 행사 스폰서인 뉴발란스의 로고가 사이 좋게 박혀 있는 하늘색 긴팔 티셔츠, 달리면서 물을 마실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는 바틀, 얇은 검은색 짐백, '서울 마라톤'이라는 행사의 이름을 상기시켜주는 아기자기한 스티커들까지 알차게 담겨 있었다. 감동의 눈물을 흘릴 정도의 구성품은 아니었지만, 왠지 선물같이 느껴져 기분을 들뜨게 만들어 줄 정도는 되었다. 택배에 함께 동봉된 팜플렛을 읽어 보고 행사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약간의 긴장감과 그보다 더 큰 설렘을 느끼며 그 날을 기다렸다.
마라톤 대회는 잠실 종합운동장에서 열렸다. 행사 시작 시간은 8시, 집결 시간은 7시였다. 모처럼 새벽에 일어나 종합운동장역에 내리니 이게 웬일, 사람이 엄청나게 많았다. 행사장으로 나가는 지하철역 출구로 사람들이 끝없이 올라왔다. 종아리에 근육이 빡세게 서있는 젊은 남자, 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젊은 여자, 앳된 기운을 뿜어내며 장난을 치고 있는 고등학생 무리들, 목에 수건을 두른 아저씨와 고글을 야무지게 쓴 아주머니까지. 각양각색의 인파들이 내뿜는 에너지는 이제 막 동이 트고 있는 이른 새벽에 환하게 활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모두 미소가 가득했고, 이들이 만들어내는 밝은 분위기 덕분에 나의 마음에도 긍정적인 기운이 깃들었다.
물품보관소에 외투와 가방을 맡기고 친구와 함께 행사장을 둘러보았다. 잠실 야구장 주변에는 행사에 참가하는 연예인들을 소개하는 JTBC 장성규 아나운서의 목소리와 참가자들의 흥을 돋워주는 음악이 함께 울려퍼졌다. 우리는 마라톤에 참가하는 연예인들을 구경하며 틈틈이 발목을 풀고 다리를 찢으며 준비운동을 했다. 그렇게 기다리고 있자니 어느덧 풀코스 마라톤 참가자들이 출발할 시간이 되었다. 10km 마라톤 참가자들은 풀코스 참가자들이 다 출발한 후에 레이스를 시작하므로, 우리는 출발선 뒤에서 조금 더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마지막 풀코스 참가자가 자신과의 기나긴 싸움을 시작하자, 발을 구르며 몸을 풀고 있던 우리들도 출발할 수 있었다. 출발 5초 전, 모두가 함께 카운트다운을 외친 뒤 드디어 1시간 동안의 뜀박질이 시작되었다.
종합운동장에서 잠실, 그리고 잠실대교로 이어지는 넓직한 차도는 마라톤 행사로 인해 통제되고 있었다. 평소에는 차에게 내어주어야 하는 도로를 이토록 많은 사람들과 함께 달리는 경험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재밌었다.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은 '완주'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뛰고 있었으며, 이들이 완주를 할 것이냐, 못할 것이냐, 완주를 한다면 기록은 얼마가 나올 것이냐, 하는 문제들은 모두 자신에게 달려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도로위를 빽빽하게 채우며 함께 뛰는 수많은 사람들은 경쟁자가 아니었으며, 그저 서로의 한계를 시험하는 순간을 함께하는 동반자일 뿐이었다. 같은 목표를 향해 함께 달리는 즐거움은 꽤나 새로운 쾌감으로 다가왔고, 그래서 힘들게 달리는 중간중간에도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며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레이스가 막바지에 다다라 500m가 남았다는 표지판을 보았을 무렵, 아직 남아있던 체력을 짜내서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막판 스퍼트를 올린 덕분에 1시간이 지나기 전에 결승선을 통과할 수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아침 공기를 맞으며 한데 모이고, 함께 달리고, 함께 힘들어하고, 또 함께 결승선을 넘어 함께 뿌듯함을 만끽하는 것. 이 모든 순간을 나도 함께 즐길 수 있었다는 사실은 커다란 행복으로 다가왔다. 이 에너지와 이 즐거움을 더 자주 느끼기 위해, 내년부터는 분기에 한 번, 혹은 반기에 한 번이라도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기로 친구와 함께 다짐했다. 새로운 경험을 통해 예상을 뛰어넘는 만족을 느끼는 건 늘, 언제나, 항상 짜릿하다. ⓒ라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