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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은늘 May 03. 2021

송당마을에 들어선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2021년 5월 2일

제주도에 스누피 가든이 생겼다길래 작년 여름부터 가보고 싶었다. 다만 여러 가지 이유로 미뤄졌는데 드디어 이번 주 금요일, 스누피 가든만을 위해 충동적으로 제주도에 날아갈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제주도는 내게 그리 호감을 주지 못하는 섬이었다. 어릴 땐 부모님 신혼여행 앨범에서 본 돌하르방이나 조랑말이 전부. 다 커서는 서른한 살 끝자락에 회사 송년회로 끌려간 곳. 처음 본 제주도는 야자수가 심어져 있는 공항에서 벗어나자 경기도와 비슷했다. 레일 바이크는 춘천보다 지루했고 아쿠아리움은 서울이 나았다. 여행 다녀온 친구들이 올리는 사진 보면 이렇게 안 생겼던데. 회사 차에 실려 다니던 나는 롱 패딩에 파묻혀 흥미를 잃었다. 그래도 혼자 하루 더 묵을 요량으로 해안가 동네로 가니 좀 더 관념 속의 제주도가 나왔다. 반가움도 잠시, 제주도의 겨울은 너무 차고 쉽게 어두워지는 것이 단점이었다. 어쩌다 사람 없는 곳에 숙소를 잡았는지 주위는 적막하기까지 했다. 다이나믹 부산 출신인 나는 제주의 밤이 어려웠다. 그 뒤 공황발작으로 끙끙 앓으며 택시, 공항 의무실을 거쳐 귀환했으니 기억이 좋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귀여움은 세상을 구할 힘이 있다. 어두운 과거 따위가 스누피와 내 사이를 갈라놓지 못하지. 깜찍한 스누피를 향한 나의 광기는 제주 쪽으로 흐르던 은은한 회피를 잠시 눌렀다. 호기롭게 몇 번의 클릭만에 스누피 가든 패키지가 포함된 호텔을 예약한 나는 새벽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로비에서 깨달았다.


“2로 시작되는 버스는 다 그래요. 갈아타는 데 50분은 걸릴 건데 여기서 어떻게 가려고 그러나.”


 제주도는 정말 크고 이 호텔은 딱히 스누피 가든과 가까워서 표 이벤트를 하고 있던 것이 아니구나. 스누피 가든이 있는 구좌읍에 가려면 순수 버스 탑승 시간만 1시간 30분인데 세 번 갈아탈 때마다 지옥의 배차 간격까지 껴있었다. 돈을 아끼겠다고 버스 정류장만 몇 군데를 돌아다니다 보니 지난 제주는 잊은 지 오래였다. 옛 감상을 떠올릴 시간이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나는 대기업을 19년 다니시다 은퇴 후 지금은 아내 눈치를 보지 않고 골프를 하기 위해 간간이 택시 운전 중이시라는 발랄한 아저씨의 얘기를 들으며 구좌읍에 입성했다. 그리고 내 키에 겨우 반만 한 어린이들 사이에서 스누피 도장을 찍으면서 행복해했다. 과연 이렇게 나무가 많고 넓은 공간을 창의적으로 쓰려면 공항에서 한참 멀긴 해야겠지. 나는 고생한 건 지우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연광의 스누피는 더 귀엽고, 가든 중간에 있는 레모네이드 카페는 볕이 너무 예뻐서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러니까 내가 이번 여행에서 송당마을에 들어선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뚜벅이인 내가 이동하기에 용이할 것, 사람이 얼마나 많을지 모르니 예약이 가능할 것, 이 두 가지를 충족하는 스누피 가든 근처 밥집을 찾았을 뿐이다. 점심을 때우러 간 송당은 아기자기한 식당, 독립 서점, 소품샵들이 있고, 지붕이 낮고 돌담이 있는, 해가 예쁘고 고즈넉한 마을이었다. 곳곳에 나른하게 녹은 고양이들도 보였다. 나는 이름도 모르고 서사도 모르는, 그리고 마을이 있는 줄도 몰랐던 이곳에 첫눈에 반했다.


‘금백주라는 여신이 서울 남산에서 태어나 혼기가 되자 제주도 송당마을의 소천국이라는 남자를 찾아와 결혼을 하였다. 자식을 많이 낳고 파란 많은 일생을 마친 뒤 각각 윗 송당과 아랫 송당에서 죽자 부부는 각 마을의 당신이 되었고, 자식들도 각자 자기가 차지할 마을을 찾아가서 제주도 내 여러 마을의 당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출처. 국가 문화유산 포털)

 

 언제 나를 삼킬지 모르는 모진 바다, 그를 터전으로 사는 섬사람들은 다양한 민간 신앙에 의존하게 된다. 제주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송당마을은 만 팔천 신들의 어머니 금백조 신화가 있는 곳이라고 한다. ‘소원을 비는 마을’이라 불리는 조용하고 신성한 마을. 나는 은퇴하면 여기서 글을 쓰며 종종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가, 새 직장에서 재택 여건만 된다면 한 달 살기를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가, 다 필요 없고 빠른 시일 내에 송당마을에 묵으러 다시 제주에 올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웬일이래. 나는 자랐고 제주는 컸고 기억은 기억으로 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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