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4월 11일
나는 어릴 때부터 학원을 많이 다녔다. 가장 많이 다닐 때는 열한 개까지도 다닌 것으로 기억한다. 애석하게도 그중 대부분은 내 인생에 작은 흔적도 남기지 못했으나, 그 시절 홍수가 나도 주 6일제를 지키며 벌어온 아빠의 월급이 가치 있게 소비된 것처럼 엄마에게 안정감을 주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나 역시 작년에 백수 동생을 꼬드겨 800만 원 돈인 부트캠프를 듣게 했기 때문에 그 마음을 잘 안다. 피 같은 내 퇴직금은 강남 굴지의 학원에 흩뿌려졌지만, 우리 집 귀여운 히키코모리가 기어이 개발자로 밥벌이를 시작했다는 데서 800조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한 계절 고생하더니 개발자로 취업하는 동생을 보니 부럽기도 했다. 나도 다 때려치우고 부트캠프 가버려? 하지만 나는 이성적인 문과생이다. 1가정당 부트캠프에 쓸 수 있는 금액 상한선을 AI 스럽게 계산해보자. 우리 집안은 더 이상 부트캠프 비즈니스에 이바지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렇다고 내가 동생만 학원을 보낸 것은 아니다. 잘 참다가도 더 있어 뵈는 직장인이 되고 싶다는 울분이 터질 때면 나는 로또를 사듯이 학원에 등록했다. 보통은 분명한 방향성 없이 허세가 있는 선택이었는데 가령 영어 정복이라든가 데이터 분석이라든가 파이썬 개발 등이 그랬다. 생존을 위해 배운 카메라 작동법이나 색 보정 등은 쏠쏠하게 일터에서 써먹었으나 그렇다고 내가 전문가를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 방황 끝에 나는 미래를 위한 집중 투자처를 단일화했다. 글을 쓰자.
해서 이번 퇴사를 하면서는 새 직장을 찾을 때까지 소설을 한 편 써보고 싶었다. 최소 한 두 달은 걸릴 테니 쓸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글을 빨리 쓰는 편이잖아?
아니었다. 살면서 이렇게 글이 안 써진 적은 처음이다. 한 달을 발단만 고치다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아 엎었다. 제대로 된 뼈대 없이 설정만 몇 번을 더한 혼종 상태이니 당연한 결과다. 지금 가지고 있는 소재는 원래 M사 극본 공모전에 내려고 쓰던 것이다. 사실 마감 일주일 전에 발견한 공모전이었기 때문에 날려써도 시간 내에 끝내는 것은 무리라는 걸 알았다. 그래도 뭐라도 해야 마음이 편했다. 1화 대본을 끄적이다가 기한이 꽤 남은 N사 웹소설 공모전 광고를 보았다. 웹소설 문외한이지만 저 정도 기간이면 나도 분량 맞춰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충동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다른 공모전으로 도망가는 과오는 저질렀다. 알고 보니 웹소설 공모전의 마감 기한은 몇 달 뒤가 아니었다. 매주 한 편에 5,000자 이상을 연재하여 기간 내에 30편이 넘는 글을 쓰는 것이 룰이다. 그러니까 나는 공모전 방식도 모른 채, 웹소설 한 편 읽지 않고, 장르나 트렌드에 대한 이해 없이 누군가는 진지하고 철저하게 준비했을 세계에 나태한 발을 들인 것이다.
극본을 소설로 바꾸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어려웠다. 게다가 웹 소설스럽게 만든답시고 원작에서는 거의 없던 로맨스를 무려 4각 관계로 늘리면서 본래의 메시지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나는 5주 정도 연재하다가 이건 아니라는 생각에 결국 중단했다. 글을 끝내지 못했다는 자괴감은 1초도 가지 않았다. 그 무렵 웹드라마 회사에 다니고 있어 사내 공모전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웹드라마는 대부분 주 시청연령층이 10대고 제작비가 적은 편이라 제작 환경에 맞는 기획을 하는 것이 중요해 보였다. 뭘 써야 대표님에게 선택당해서 제작까지 하게 될까? 매일 자극적인 썸네일을 상상하며 제목만 수십 개를 쓰고 페르소나를 만들었다. 하지만 나를 신나게 하는 아이디어는 없었다. 그때부터였다. 답보 상태에 빠진 것이.
나는 드디어 이대로 아무 공모전이나 내는 걸 목표로 하다가는 영영 길을 잃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처음의 기획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내가 진짜 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내가 잘 쓸 수 있는 톤 앤 매너로 딱 한 권 분량만 완성하자. 그 뒤에는 독립 출판을 하든 크라우드 펀딩을 하든 그때 가서 생각을 해보자는 마음이었다. 이번에는 꼭 이야기를 끝까지 마무리해야 한다.
일전에도 썼듯이 나는 죽음으로 파생되는 이별에 대한 공포가 크다. 슬프게도 모든 인간의 삶은 때와 길이가 다를 뿐 유한하고, 누군가는 이별의 아픔을 안고 남은 수명을 채우게 된다. 당연한 건데 나는 그게 너무 무섭다. 해서 내 두려움을 달랠 수 있는 귀여운 판타지 소설을 쓰고 싶었다. 글이 막힐 땐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여전히 즐겁지 않았다. 한 번 궤도를 잃은 창작의 습관은 그 이전을 까마득하게 잊고 뒤숭숭하기만 했다. 공부하려고 사놓은 대본집들은 어느새 화상 면접을 볼 때 노트북을 받치는 용도로 쓰이고 있었다. 오늘은 면접을 보느라 힘들었으니까. 오늘은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느라 긴장했으니까. 갖은 핑계로 일주일째 글을 쓰지 못하던 찰나 휴대폰을 붙들고 있는데 웬 학원 광고가 떴다. 사이트에 들어가니 다큐, 뮤직 비디오, 숏폼 기획 등 창작을 위한 다양한 수업이 있었다. 요새 이런 분야도 학원이 있구나. 나도 작가 학원에 다녀볼까?
작가 교육원은 대표적인 곳이 몇 군데 있었다. 나는 밤새 열심히 검색해서 내 학업 스타일에 잘 맞으면서도 듣고 싶은 수업을 찾았다. 수강료가 부담스러웠지만, 나의 상태는 더 부담스러웠으므로 아깝지 않았다. 작가님의 첫 수업은 가히 족집게의 연속이었다. 초보 작가가 자주 범한다는 우를 빠짐없이 차근차근 밟고 있던 나 자신이 아주 감탄스러웠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작가님이 내주신 프로세스에 따라 글을 쓰는 연습을 해보기로 했다. 이전 단계가 별로면 작가님이 다음 단계로 보내주시지 않기 때문에 수업 중에 마지막 단계까지 가는 학생은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거기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 시나리오를 쓰는 공모전 수업을 들을 수 있다. 올해는 트리트먼트를 완성하고, 그 트리트먼트가 가능성이 있다면 시나리오까지 완성해봐야지. 수업이 너무 재미있어서 나는 첫 판만에 글태기가 지나간 마냥 굴고 있다. 필기한 내용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배운 대로 빨리 글을 쓰고 싶다.
아마도 반에서 제일가는 초짜, 당장은 발전시킬 아이템조차 없다. 그래도 나는 과제 하나는 성실히 하는 나를 믿는다. 힘내라 학원형 인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