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27일
친구가 새로운 취미로 타로 카드를 구매해서 신이 났다. 해서 요즘 종종 나에게 비대면으로 타로를 봐주고 있다. 친구가 카드 사진을 찍어서 보여주면 그중에서 느낌이 오는 것을 고르면 된다. 어제는 넋 부랑자가 된 채로 '작사 공모에 계속 도전할 수 있을까.'에 대한 타로를 봐달라고 했는데 과거, 현재, 미래 모두 좋은 카드지만 역방향으로 나와버렸다. 친구의 책에 따르면 카드가 역방향이면 좋았던 의미가 바뀌어 버린다.
'기회는 이미 손안에 있는데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사그라들어서 조급한 행동을 한다. 자아실현의 여정에 올랐으나 어떤 계획이나 규율이 없어 힘든 상황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중요해 보이는 커다란 업무보다도 일상적인 루틴을 지키는 데 힘을 써야 한다.'
기초부터 상급반까지 거의 일 년이 걸리는 작사 학원 커리큘럼을 수료하면서 나는 15개의 공모곡에 도전할 수 있는 자격이 생겼다. 겨우 그 안에 데뷔할 가능성은 0에 수렴하지만, 다행히 이후에도 데뷔 준비반을 등록하면 무한대로 공모곡을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다. 내가 지치지 않고 수강료를 낼 돈만 있으면 몇 년이고 될 때까지 도전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그런데 내가 그 '데뷔 준비반' 등록을 못 해서 도전을 못 하게 될 줄은 몰랐지. 정각에 신청했는데 예비 번호도 못 받을 줄이야. 당장 다음 주부터 나의 계획이 완전히 틀어졌다. 애써 유지시킨 평정도 깨지기 시작했다.
원래 나는 몇 개의 공모곡이 오든 내가 딱 행복한 만큼만 작업을 하고자 마음을 먹었다. 최대한 많이 하겠다고 집착하면 정신에 유해한 구조이기 때문이다. 작사는 언제 어떤 소속사의 곡이 몇 개가 올지 모르고, 마감이 언제까지일지도 모른다. 가령 a라는 곡이 3일의 기한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마감까지 마음 놓고 차근차근 작업을 진행할 수 없는 것이다. 중간에 b라는 곡이 추가로 들어오는 일이 허다하고 그 곡의 마감이 더 짧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과욕을 부렸다가는 밤샘이 당연해지면서 일상이 무너지기 십상이다. 그래서 나름 여유를 부렸는데 앞으로 한 달 간은 곡을 못 받는다니? 데뷔도 못한 내가 곡을 고를 때가 아니었구나? 쏟아지던 공모곡이 끊기자 나는 극도로 불안했다. 공백을 참지 못하고 한시라도 뭔가 쓰고 싶었다.
그러니까 나는 왜 이렇게 조급한가.
유치뽕짝인 나는 매년 나이만 먹었지 정신머리가 항상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때에 멈춰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작년은 이상한 한 해였다. 뭔가 안에서 팍 하고 터진 것처럼 나도 모르는 사이에 경계선을 넘은 기분이 들었다. 이제 정말 어른이 된 기분. 하지만 어릴 때 상상한 것처럼 슬프지도 않고 그렇다고 좋지도 않고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마침 재작년부터 내 마음에 불어버린 바람 때문에 야근이 많았을 뿐 심플했던 나의 삶이 180도로 변해버렸다. 마케터로 쌓은 커리어를 버리고 야심 차게 꿈을 좇아 들어간 웹드라마 회사에서 좌절을 맛 본 2년 전, 답답한 마음에 회사 건물 1층에 있는 타로 집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계속 돈이 들어오는 걸 보니까 이직은 잘 되고, 회사도 잘 다닐 거야. 근데 마음이 불덩이 같아. 2020년에도, 2021년에도, 2022년에도 마음이 너무 힘들다고 나와. 멀쩡하게 돈도 잘 들어오고 회사에서 인정도 받을 건데 이런 건 욕심이 많아서 그래. 자기는 욕심을 안 버리면 마음이 힘들어."
욕심이 많아서. 타로 집 아주머니의 말이 용했다. 나는 다음 해에 드디어 스타트업이 아닌 지금 회사에 입사하면서 훨씬 안정된 삶을 살게 되었지만, 동시에 작사 학원과 작가 학원을 다니는 무리수를 뒀다. 어느새 이 욕심이 사는 이유처럼 되어 버려서 어떻게 해야 할지 나도 잘 모르겠다. 자발적으로 사라진 저녁 있는 삶, 주말 있는 삶. 광활한 우주 속 아주 작은 행성에서 찰나를 스치듯 살면서 나는 무엇을 그렇게 남기고 싶은 걸까. 작사가가 되고 나면, 내가 쓴 드라마가 나오면 그때는 안심하고 1종 면허도 따고 요리도 배워서 그토록 로망인 캠핑을 가게 될까. 방울토마토도 키우고 양배추도 키우면서?
덜어낼 만큼 덜어내도 쉬이 줄여지지 않는 욕심을 다독이며 나는 이다음의 나를 보고 싶다. 달리 뾰족한 수가 없다. 생각이 많아지고, 두렵고, 현타가 밀려오는 날에도 그냥 하는 수밖에. 홀로 컴컴한 터널을 걷는 것 같았던 주니어 마케터 시절, 나는 여기서 멈추면 나를 구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되뇌었다. 적어도 내 인생에선 나를 구할 수 있는 건 나뿐이었다. 과거의 내가 구해준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다. 그러니까 응원해. 나는 네가 꼭 꿈을 이루길,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