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은늘 Oct 11. 2022

내가 불꽃축제에 가고 싶었던 이유

2022년 10월 9일

고2 때였던가 고3 때였던가 노량진에서 단과학원을 다니고 있던 어느 날 바깥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선생님은 여의도 불꽃 축제 소리라며 분필을 훠이 훠이 흔들어 우리를 위로했다.


"내년에 가. 수능 끝나고 내년에. 대학 가면 다 된다."


딱히 불꽃축제에 가고 싶은 걸 꾹 참고 창문도 없는 교실에서 공부하고 있던 건 아니었지만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니 문득 궁금해졌다. 그럼 매년 수업하는 선생님은 언제 불꽃 축제를 보러 갈 수 있어요?


마법처럼 가면 다 된다던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마주한 것은 저절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 등록금과 과제였다. 나는 아르바이트와 학점에 허덕였다. 다만 첫 수업 때 미소가 인자하시던 교수님이 신입생들에게 하신 말씀은 낭만적이었다.


"여러분, 봄이 정말 아름답지 않나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가 살면서 이 아름다운 계절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무한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중간고사만 끝나면, 토익 점수만 잘 받으면, 취업만 하면... 하고 미루지 말고 좋은 계절을 꼭 즐기세요."


하지만 조금 가난하고, 이루고 싶은 것은 조금 많았던 이십 대의 나는 수능이 끝나고도 불꽃 축제에는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그토록 좋아하는 봄꽃은 중간고사가 끝나면 매번 비가 와서 땅바닥에 눌어붙은 모습만 보았다. 알바를 하면서, 언론 고시를 준비하면서, 야근을 하면서 내년에는 꼭 즐겨야지 해놓고 좀처럼 감상하지 못한 예쁜 계절들. 뭘 놓치고 있는지 알면서도 어떻게 멈춰지지 않던 일상.


그런데 답지 않게 이번에는 갑자기 여의도 불꽃 축제가 너무 보고 싶어졌다. 인터넷에는 불꽃 축제를 두고 인파가 역대급으로 몰릴 테니 '가지 마라'는 경고 짤만 돌아다녔지만 며칠간 그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해서 나는 나의 비위를 맞춰주기로 했다. 생전 안 그러다가 이 정도로 애가 닳는 걸 보면 뭔가 쓸만한 이유가 있겠지. 하지만 이미 웬만한 호텔은 다 예약이 끝나 있었고 크루즈나 레스토랑도 마찬가지였다. 명당으로 유명한 사육신 공원이나 노량진 수산시장 주차장 등을 검색해보던 나는 결국 가장 현실적인 방법을 찾았다.


일단 여의도 근방 지하철역이 혼잡해지기 전에 미리 여의도에 도착해서 작사를 하고 있다가 불꽃 축제 시간이 되면 여의도 한강 공원에 걸어간다는 것이 두뇌를 풀가동한 나의 계획이었다. 좀 거리가 있는 명당들은 자리를 미리 맡지 않으면 불꽃이 안 보일 수도 있지만 직접 불꽃을 쏘는 여의도 한강공원 쪽이면 끄트머리에 서 있어도 불꽃 꼭지라도 보이지 않겠냐는 계산이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위험할 것 같으면 불꽃 축제는 못 보고 집에 그냥 돌아올 요량이었다. 작전에 실패해도 작사 시안은 썼을 테니 여의도까지 간 것이 시간 낭비는 아니라며 위안으로 삼을 수 있다.


결과적으로 시간 맞춰 씩씩하게 걸어간 여의도 한강공원은 성공적이었다. 사람은 많았지만 나 하나 들어갈 공간은 충분했고, 늦게 도착한 나도 바로 강물 앞에 앉아 불꽃을 기다릴 수 있었다. 까만 하늘에 거의 둥그런 달이 떠 있는 것을 보며 괜히 안 설레는 척하며 앉아있던 나란 어른. 예고 없이 첫 번째 불꽃이 터졌을 때는 왜인지 눈물이 찔끔 나올 뻔했다. 너무 예뻐서. 밤하늘에 금가루를 뿌린 것 같기도 하고, 별똥별이 우수수 내려오는 것 같기도 하고, 환호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행복에 겨웠다. 롱 패딩을 챙겨간 것이 무색하게 마침 날씨도 선선하고 좋았다. '내가 이걸 보고 싶었나 보나. 오길 잘했다.'


어쩌면 열아홉 살의 나는 문을 박차고 학원 옥상에 올라가서 불꽃놀이를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여의도에 출근하는 PD가 되겠다며 꾸역꾸역 여의도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스무 살은 집에 가는 길에 매번 끓어오르는 마음으로 KBS와 MBC 건물을 배회했다. 세상에는 벚꽃이 피는 줄도 불꽃이 터지는 줄도 모르고 PD가 되고 싶었다.


불꽃 축제를 볼 생각에 샛강역을 나와 제일 먼저 보인 KBS 건물에 나는 놀랐다. 이게 여기 있었던가? 어느새 나는 솜사탕이 흩어진 것 같은 구름이 더 신경 쓰이는 사람이 되었다. 무던하게 메모장에 나중에 가사에 쓸만한 표현들을 쓰면서 오랜 나의 꿈이었던 그곳을 지나쳤다. 절대 불변할 것 같던 것도 시간이 달라지게 하는 것이 있다. 나는 여전히 하고 싶은 일이 많은 사람이지만, 이제는 정말 어린 날과는 다른 모양의 무언가를 쫓고 있는 것 같다. 예전에는 그게 슬플 줄 알았는데 나이를 먹고 보니 그렇지만도 않다. 나는 또 지금의 내가 인생의 무언가를 통달하게 되었고 달라졌다고 생각하지만 미래의 내가 보면 영 아닐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 글을 읽으면서 불꽃 축제를 보고 벅찬 나를 재미있어할 테니 기록한다.


이전 14화 작사가로 데뷔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