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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은늘 Mar 20. 2022

나는 강물처럼 꿈을 꿔요.

2022년 3월 20일

날씨가 좋아서 정말 오랜만에 밖에 나가 산책을 하고 왔다. 이직한 회사는 코로나가 시작되자마자 거의 2년 넘게 재택 중이라 밖에 나갈 일이 별로 없고, 작년부터 작가 학원과 작사 학원에 다니느라 퇴근 후 남는 시간이 늘 없었는데 모처럼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여유가 있다고 호락호락하게 움직일 내가 아니다만, 주말 동안 책을 무려 7권이나 읽었는데도 시간이 남으니 뭔가 어색했다. 해서 매번 동생을 시키던 음식물 쓰레기를 자발적으로 버리러 나갔는데 하늘이 너무 예뻐버린 것.


 좀처럼 책을 읽지 않던 내가 요새 책을 많이 읽는 이유는 회사에서 매달 콘텐츠 구입비로 12만 원을 쓸 수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최근 몰두하고 있는 작사 공모 때문이다.


 나는 앱 서비스를 만드는 IT 회사에서 마케터로 일하고 있다. 해서 다른 마케터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마케팅을 잘하기 위해 방구석에서 늘 휴대폰을 본다. 가령 A 플랫폼은 사용자가 콘텐츠를 소비할 때 위에서 아래로 스크롤을 내린다. 스크롤을 아래로 내리다가 중간중간 광고 영상이 자동으로 재생되는 방식이다. 사용자는 선택적으로 손을 멈춰서 영상을 볼 수 있다. 반면 B 플랫폼은 사용자가 원하는 영상을 보려고 클릭하면 앞부분에 강제로 몇 초 이상 광고 영상을 봐야 한다. 6초가 지나고 나서 광고를 더 볼지 말지 선택할 수 있기도 하고 강제로 끝까지 봐야 하는 경우도 있다. C는 링크를 클릭하게 유도하는 편이다. 그 링크를 클릭해서 도착하는 페이지는 회사들의 목적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나는 이렇게 다양한 플랫폼 안에서 최대한 많은 회사의 광고를 눌러보면서 그들이 어떤 식으로 사용자들을 데려가려고 하는지, 사용자 입장에서 어떤지 상상한다. 그리고 커뮤니티 속에서 사람들의 댓글을 보면서 대중을 배운다. 유행이라는 콘텐츠를 챙겨보고 나면, '이런 장면은 대중들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구나', '이런 식의 전개가 요새 시청률이 높구나', '이런 캐릭터는 시청률과 무관하게 충성도 높은 과몰입러들을 만드는구나' 같은 것들은 눈치껏 학습하는 것이다. 마케터로서의 나는 이 모든 것을 휴대폰 속에서 본다.


 하지만 작사는 다른 것 같다. 작사는 글이 아니고 설명도 설득도 아니다. 화법 자체가 다르다. 작사는 주로 화자의 눈으로 보는 한순간의 장면과 그 시점 속에서 느끼는 감정에 대해 쓰게 된다. 노래 한 곡에 들어가는 자수는 대부분 짧기 때문이다. 그 화법을 배우기 위해 이제껏 해온 것처럼 휴대폰을 켜 이미 발매된 곡들의 가사를 검색해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점차 그것만으로는 한계가 느껴졌다. 그리하여 추가 방편으로 시작한 것이 독서인데 여러 분야의 책을 통해 다양한 상황과 공간을 묘사하는 시선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됐다. 매일같이 집에 새로운 책이 배송되는 데 막상 읽어보니까 세상에 재미있는 책이 참 많다.


 그래도 역시 직접 보고 느끼는 것이 더 좋겠지? 오늘 바깥공기를 맡으며 붕방붕방 뛰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든다. 하늘에 구름은 어떻게 떠 있고 움직이는지, 햇빛이 구름을 비추면 어떤 모양이 되는지, 산책하는 강아지의 꼬리는 어떻게 움직이는지, 물에 비친 건물의 모습은 어떤지, 방금 까치가 입에 물고 가던 솜털 같은 가지는 무엇인지. 맑은 하늘 아래서 나의 시선에 들어오는 찰나의 순간들을 관찰하는 것이 좋았다. 오늘은 비눗방울도 보았다. 비눗방울은 내 생각보다 꽤 오랫동안 하늘을 떠다니는 편이었는데 바람 탓인지 위로 올라가는 애들도 있고 아래로 떨어지는 애들도 있었다. 그중 한 비눗방울은 떨어질 듯 말 듯 위로 한참을 위로 올라가더니 거의 천의 반대편까지 날아가서 한참을 맴돌다가 땅으로 내려가 터졌다. 그 순간 오리 두 마리가 양쪽으로 퍼지는 모습을 보았다. 뭔가 엄청난 행운의 장면을 본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여유롭게 기대서 흐르는 물을 바라보는 감성을 누리고 싶었던 나는 호시탐탐 그네나 그물에 퍼질 기회를 봤지만, 만석이라 모두 실패했다. 결국 하나 남은 벤치에 정자세로 앉아 품에 꼭 안고 갔던 그림책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를 펼쳤다. 책 속의 글자와 내 눈앞의 천을 번갈아가면서 보는데 우리 집 앞에 있는 건 강이 아니라 천이라 책에서 묘사된 물의 모습과는 좀 달랐다. 천은 강처럼 물거품을 일으키고 소용돌이를 치진 않는다. 다만, 빠른 물살 너머의 잔잔한 부분이 있다는 것은 천도 마찬가지였다. 주인공의 말처럼 더듬거리다가도 쉼 없이 흐르는 것까지 똑같아. 나는 빠른 물살이 흐르는 천의 중앙 부분이 꼭 저화질의 영상처럼 우글거리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는데, 문득 그곳에 오리들이 모여서 가만히 떠 있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왜 잔잔한 부분에 있지 않고 굳이 저기에서 쉬고 있는 거지? 그중 움직이던 오리는 조금만 힘을 빼면 물결을 따라 왼쪽으로 쓸려갔다. 물결대로 가면 편할 텐데 열심히 반대쪽으로 물살을 가르며 가고 있었다. 그럼 오리 뒤로 길게 길이 생겼다. 생각보다 더 길게 물에 자국이 남는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그때 내 뒤에서 "오빠, 꽃이 폈어요. 봄이 왔어요. 건강하세요."라고 경쾌하게 통화하시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엿들은 그 말이 너무 좋아서 나도 이 풍경을 수십 번 더 본다 해도 매번 꽃 피는 봄을 예쁘게 여기는 할머니가 되고 싶었다. 뿌듯하게 부푼 마음으로 단지에 도착했는데 위층 할머니들이 층간 소음으로 열렬히 싸우고 계셨다. 그래... 이런 일도 저런 일도 봄이고 인생이지....... 그나저나 나 작사가 데뷔할 수 있겠지...?


나는 강물처럼 글을 써요. 그리고 꿈을 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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