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만난 지 29주 차
아가야,
지난 검진 때 아가의 머리가 아래로 내려와 자연분만이 가능하다는 소식을 들었어. 엄마는 진통보다 개복이 더 무서워서, 자연분만이 가능하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기뻤단다. 아가는 어떨까? 초음파로 보이는 너는 도톰한 입을 움직여 하품을 하고 있었어.
분만에 관한 공부를 하다 보니, 무통주사의 효과에 대해 질문이 생겼어.
“무통주사 안 맞으면 많이 아픈가요?”
의사 선생님께서는 왜 안 맞으려고 하냐고 반문하셨지.
“힘주는데 어렵다고 해서요.”
의사 선생님은, 무통주사는 아가가 나올 자궁구가 열리는 과정에서 생기는 진통을 완화하기 위한 것이고, 힘주는 건 자궁구가 모두 열린 이후이기 때문에 서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하셨어. 자궁구가 너무 열리면 무통주사를 아예 못 맞기 때문에, 완벽한 타이밍에 맞을 수 있다면 안 맞을 이유가 없다 하셨어. 그러면서 정말 아플 거라고 말씀하시더라고. 아가도 힘들고 아플 텐데 엄마만 무통 해서 어쩌지. 엄마가 아가 힘들지 않게 호흡도 잘 하구 힘도 잘 줘서 수월하게 태어나도록 노력할게!
검진 다음 날, 엄마와 아빠는 거제도로 여행을 왔어. 먼 거리이지만, 충분히 잠을 자고 여유롭게 출발을 했지. 6월 말 여름이 한창 무르익는 때에 바다를 실컷 보기 위해 거제도를 찾았단다.
엄마와 아빠는 바다를 참 좋아하는데, 우리 아가에게 처음 바다를 보여 줄 그날이 언젠가 오겠지, 그날을 기다리고 있어.
엄마와 아빠는 맛집 앞에서 줄을 서 있다가 맛있는 파스타도 먹고, 바닷가 마을 오래된 일식 가옥을 고쳐서 만든 북카페에서 아이스라테와 까늘레를 먹으며 더위를 식히기도 했어. 그리고 평소 묵고 싶었던 어느 건축가가 설계한 숙소의 창 밖으로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기도 했어.
섬의 곳곳에는 수국이 만개해 있었어. 수국은 피어난 땅의 산성도에 따라 꽃잎의 색깔이 결정된다고 해. 어느 곳에는 연보라색 수국이, 어느 섬 귀퉁이에는 선명한 파란색의 수국이 피었어. 엄마 눈에 가장 예뻤던 수국의 색깔은 자주색과 보라색이었단다. 마침 찾아보니 거제도에 수국 축제가 열리는 기간이었어. 우연히 마주한 행운이었지. 아빠와 다음 날 아침 일찍 축제가 열리는 곳에 찾아가기로 했어.
이제는 배가 제법 불러서 오래 앉아있기도 서 있기도 쉽지 않아. 해가 서서히 떠오르는 새벽에 침대에 조용히 누워 있는데 오늘은 명치 쪽으로 아가의 발꿈치가 만져진 것 같았어. 그리고 요즘 아가는 딸꾹질을 자주 한단다. 엄마도 어렸을 때부터 딸꾹질을 참 자주 했는데, 아가는 과연 엄마를 닮은 걸까?
이번 여행에는 뚜렷한 목적이 하나 있었어. 바로 셀프 만삭사진 촬영이었어. 엄마는 조금 유난스러운 부분이 하나 있는데, 남들이 당연히 하는 것에는 슬며시 반발감이 들곤 한단다. 예를 들어, 스튜디오에서 드레스를 입고 찍는 만삭사진을 질색한다던가 하는 거 말이야. 엄마의 눈에는, 화장을 하고 드레스를 입고 볼록한 배를 드러내고 찍는 사진이 이상했어. 아가를 품고 있는 엄마의 몸이 이상하게 느껴진다는 게 아니라, 드레스와 볼록한 배는 어울리지 않아 보였어. 굳이 볼록한 배를 밖으로 내 보이면서까지 드레스를 입어야 할까? 하는 질문이 계속 떠올랐지. 그냥 그 모습 그대로 가장 자연스러운 그 모습으로 사진을 찍고 싶었어
.
엄마와 아빠의 웨딩 사진도 컨셉을 우리가 정하는 커스텀 화보였거든. 그때 바다를 배경으로 촬영을 했으니, 아가와의 만삭사진도 바다를 배경으로 찍고 싶었어. 그래서 거제도를 찾은 거였단다. 그런데 마침 수국축제와 때가 맞았으니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그렇게 엄마와 아빠는 이른 아침에 수국축제가 열리는 저구항으로 갔단다. 산새가 잔잔하고 깊은 바다를 안고 있는 저구항의 가장자리를 따라서 수국이 피어 있었어. 부지런히 떠올라 항구 곳곳을 뜨겁게 데울 준비를 하고 있는 아침햇살이 수국나무 사이사이로 떨어지고 있었어. 그곳에 삼각대를 세우고 우린 사진을 찍었단다.
햇살이 키 큰 나무를 거쳐 그림자를 가지고 땅으로 떨어졌는데, 그 속에 선 엄마의 사진 속에 아가가 있는 부분만 밝게 햇살이 떨어졌어. 아빠는 그 모양이 하트 같아 보인다며 신기해했지. 아마 아빠 눈이 이미 하트모양이라 그렇게 보인 걸지도 몰라. 그렇게 우리는 만삭사진을 찍었단다. 엄마와 아빠는 잘 나오지 않아도 상관없었어. 아가가 자리하고 있는 배 위로 햇살이 예쁘게 떨어졌단다.
아가가 태어나면, 엄마와 아빠는 매일매일을 사진으로 남길 거야. 엄마가 해줄 수 있는 재밌는 컨셉으로 사진 찍을 걸 생각하면 벌써부터 신난단다.
아가야.
엄마와 아빠는 아가와 하고 싶은 게 참 많아. 완벽하진 않아도 너와 아빠, 그리고 엄마, 우리끼리 재밌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것들을, 화려하진 않아도 우리끼리 유난스러운 것들을 신나게 하고 싶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