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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복싱 한번 배워보지 않겠나?"

캐나다 몬트리올 YMCA gym

by 쓰는사람 명진 Mar 14.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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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토박이 캐네디언이 묻는다 "자네 복싱 한번 배워보지 않겠나?" 


복싱을 배울 생각이었냐고? 아니, 그런 계획은 없었다. 하지만 인생의 많은 일들이 그렇듯, 기회는 계획이 아닌 ‘우연’의 얼굴로 찾아왔다. 오늘도 출근 도장 찍듯 YMCA 헬스장 문을 밀고 들어선다. 마치 동네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참새처럼, 헬스장 없는 하루는 어쩐지 허전하다. 


준비운동을 마치고 운동 기구를 찾아 두리번거리다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당황했지만, 캐나다식 인사법을 익힌 몸이 먼저 반응했다. 싱긋, 그러자 상대도 화답하듯 웃었다. 어른에겐 고개 숙여 인사하는 동방예의지국에서 왔지만, 이제는 외국인과 눈을 마주치면 피하지 않고 스몰톡을 나누는 경지에 은근슬쩍 적응하고 있다. 그 사람은 한 번 더 나를 쳐다본다. 

'누구지? 내가 아는 사람인가?’ 

머릿속에서 기억을 더듬고 있을 때, 상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안녕? 반가워요. 운동 열심히 하네요! 매일 오는군요?”

다가온 얼굴을 자세히 보니, 머릿속에서 ‘띠링-!’ 하고 정보가 떴다. 짧은 스포츠머리, 서글서글한 파란 눈, 다부진 체격. 희끗한 흰머리가 원숙미를 더하는 이 사람은 바로 GX(그룹 운동) 룸에서 복싱을 알려주던 분이었다. 그렇다면 운동인 마인드로 씩씩하게 인사 올려야지.

“안녕하세요! 권투 선수시죠? 복싱 가르쳐주시는 모습을 어깨너머로 몇 번 봤어요.”

그는 크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하, 나는 복서는 아니고 사진작가예요. 잡지랑 미디어에 실리는 사진을 찍어요. 복싱은 어릴 때부터 30년 넘게 한 운동이라 그냥 취미 삼아 젊은 친구들에게 가르치는 거예요. 그런데… 한국인이죠?”


예상치 못한 질문에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한국인이 드문 몬트리올에서 “니하오!”나 “곤니찌와!”를 듣는 게 일상다반사인데, 단번에 나의 정체성을 알아차리다니. 대에박-

“어… 어떻게 아셨어요?”

그는 장난스럽게 씩 웃으며 말했다.

“부인이 한국인이거든요. 덕분에 감별 레이더가 발달했죠. 하하. 그런데, 매일 꾸준히 운동하는 걸 보니 딱 성실한 한국인 느낌이던데요? 혹시 복싱도 관심 있어요? 아주 잘할 것 같은데, 운동 그룹에 함께할래요?”


두 번째 훅이 들어왔다. 그저 매일 헬스장을 놀이터처럼 가던 나였다. 그런데 그 ‘매일’이 내 앞에 새로운 문을 열어주었다. 문과 여자가 캐나다 와서 헬스장 프로 출근러가 되더니, 이젠 난생처음 권투 글러브를 끼게 되었네? 피식, 안 될 게 뭐람. 게다가 공짜 운동 수업이라니! 그렇게 나는 주먹을 말아 쥐며, 신난 참새처럼 큰소리로 대답했다. “네~!!!”



6. 성실은 괜찮아


성실한 한국인. 말하지 않아도 드러나는 우리의 국민성. 그분 말에서 전해지는 대견함에 왠지 쑥스러운 마음이 들어 뒷목을 간질거렸다.

‘근데, 그게… 그렇게 인정받을 만한 일이었나? 별것 아닌 걸 저렇게 따뜻하게 말해주다니.’ 

칭찬은 ‘열심히’가 아니라, ‘잘했을 때’ 받는 것 아니었던가?


도서관에 뼈를 묻을 때가 아니라 장학금을 받을 때.

헬스장 개근이 아니라 다이어트에 성공했을 때.

나에게 칭찬이란 과정이 아닌, 결과를 통과해야 받을 수 있는 도장 같은 것이었다.     


성실해도 경쟁에 밀려 취업 시장에서 고배를 마시고,

열심히 해도 상사의 싸늘한 피드백을 받던 순간들

그때마다 성실과 열심은 하얀 물거품처럼 의미 없이 부서져 버리곤 했다.     


존재의 쓸모를 증명해 보이기 위해 애쓰는 삶은 얼마나 갸륵하고 애잔한가. 성공보다 실패가 흔하고, 자신의 능력치보다 기대치가 더 무거운 세상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부족하다고 채찍질하기에 바쁘니까. 2시간씩 매일 운동하면서도 뱃살을 움켜쥐며 좌절하던 어제의 내게 미안해졌다. 모든 걸 결과로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배운 오늘. 처음으로 '잘했어'가 아니라 '괜찮아'라는 말을 내 안의 나에게 건네 본다. 꾸준히 지켜내는 성실의 힘만으로도 충분한 날이 있다는 걸 기억하며 오늘 운동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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